▶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지난 수십년 간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해 온 담론은 성장 제일주의였다. 인간의 행복은 경제 성장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성장숭배’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면 그 혜택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된다는 환상이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의 의식 속에 꽉 차 있었다. 빈곤문제 역시 성장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경제성장이야 말로 최고의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 속에는 성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의식이 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노동쟁의와 공정한 분배요구는 성장을 저해하는 사회악이나 적으로 규정되기 일쑤였다.
경제적 성장과 빈곤 퇴치는 얼핏 그럴듯한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 상관이 없다. 서로 맞물리지 않은 채 따로 논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경제정책연구소(EPI)가 발표한 광범위한 임금관련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여년 사이 미국은 상당히 건실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빈곤층 비율은 오히려 1970년대 이전보다 높아졌다.
연구소는 경제성장과 빈곤 퇴치가 정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라면 미국의 빈곤률은 1986년에 0으로 떨어졌어야 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0이 되기는커녕 성장 속에서 빈곤률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1979년부터 2007년 사이 미국의 하위 20% 계층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단 3.2% 늘어났다. 28년 사이의 눈부신 경제성장이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봐도 성장의 실과는 부자들을 거친 후 점점 밑으로 내려와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지게 된다는 ‘트리클 다운(낙수)’이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정치인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를 주도해 온 보수세력은 우선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느니, 부자들과 대기업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성장이 가능하고 그래야 나눌 파이가 커진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현상은 물이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리는 ‘트리클 다운’이 아니라 부의 원천인 밑의 물을 위로 뽑아 올리는 ‘지하수 펌핑 효과’였다. 경제성장의 비율만큼 부유하게 되기는커녕 열심히 일하는데도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는 빈곤층 임금노동자들의 현실이 산 증거이다.
한 경제비평가는 트리클 다운의 허구성이 경제 구조의 가장 위에 놓여 있는 그릇의 문제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릇에 물이 넘치면 아래로 흐른다고 하지만 그 그릇은 너무 넓고 깊어서 물이 차는 법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고인 물을 흘려보내고 같이 나누기에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탐욕이 너무 크다는 말이다. 또 위쪽 큰 그릇의 뒤로 절묘하게 구멍을 내 부단히 물을 빼내 간다. 그러니 흘러넘칠 만큼 충분한 물이 고일 새가 없다.
성장의 혜택은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돼 있다는 논리는 인간 본성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해석이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대체적인 인간은 자기 주머니에 들어 온 부를 기꺼이 같이 나눌 만큼 이타적이지 못하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저수지에는 물이 너무 고여 썩어가는 데도 밑의 가난한 농가들에서는 논과 밭에 줄 물이 없어 곡식이 말라죽는 안타까운 형국이다. 저수지에 고인 물이 고루고루 땅을 적실 수 있도록 하려면 인위적으로 물길을 만들어줘야 한다. 가진 자의 시혜와 베풂에 의지하는 분배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임금체계와 세제 등을 통해 이를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요체이다.
성장은 필요하다. 그것 자체는 결코 악이 아니다. 그러나 성장에만 지나치게 매몰돼 빈곤층의 처지를 외면한다면 그런 성장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무조건 성장이 아닌, 올바른 성장이 요구되는 것이다.
올바른 성장이야말로 위기에도 잘 흔들리지 않고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복지 선진국들은 실증한다. 이번 경제연구소의 발표는 미국의 경제성장이 올바른 성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수치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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