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개헌론 발언을 둘러싸고 불거진 정치권의 소동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확인시켜 준 씁쓸한 해프닝이었다. 김 대표의 언급은 대통령이 “개헌 논의가 경제에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사실상의 ‘개헌논의 금지령’을 내린 뒤에 나왔다. 막후에서 무슨 일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으며 청와대의 경고성 비판이 뒤를 이었다.
대선 당시 개헌 추진까지 약속했던 대통령의 손바닥 뒤집기와, 청와대가 인상 한 번 쓰자 “죄송하다”며 하룻밤 만에 고개를 숙이는 여당 대표의 모습은 신뢰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정치인들의 표리부동과 대통령에 종속된 정당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정당의 대표라면 개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얼마든 자유로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일개 국회의원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삼권분립이다. 우리가 고교시절 일반사회 시간에 배웠던 삼권분립은 행정과 입법, 사법권이 각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뤄가는 국가 시스템을 말한다.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계몽시대 선각자들의 각성이 낳은 귀중한 산물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지만 삼권분립이 제대로 구현된 적은 거의 없다. 삼권의 역학관계에서 대통령과 행정부는 항상 기형적일만큼 우위에 서왔다. ‘사법살인’ 같은 흑역사와 권력의 의중에 따라 반역사적 입법까지 서슴지 않았던 국회의 어두운 과거가 이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이런 일그러진 역학관계의 흔적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독립적이어야 할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대통령의 눈치를 본다. 사법부 역시 출세지향적인 법관들 때문에 독립성이 상당히 훼손된 상태다(법관에서 행정부 고위직으로 곧바로 전직하는 사례가 한국처럼 많은 나라는 없다).
삼권분립을 주창한 선각자는 몽테스키외와 같은 유럽의 계몽 철학자들이었지만 이것을 현실 정치에 처음 적용한 것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이었다. 그리고 헌법에 명시된 이들의 신념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를 보면 상호 독립적이다 못해 오히려 의회가 우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으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장관급 인사들에 대해서만 인준청문회를 하지만 미국은 행정부의 차관보급 이상과 연방판사, 군 고위직, 해외주재 대사 등 무려 1,200개자리에 대해 의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 명의 의원이라도 마음먹고 태클을 걸면 인준 자체가 힘들어진다. 대통령 입장에선 의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행정부가 법안을 제출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입법권을 100% 연방 의회가 갖고 있다.
흔들리는 삼권분립의 한가운데는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같은 권력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생명은 공정성과 독립성이다. 그럼에도 이런 기관들은 종종 집권자의 정치적 도구가 돼 왔다. 복종을 끌어내고 길들일 필요가 있을 때면 이들을 동원하는 악습이 반복돼 왔다. 털어도 먼지나지 않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흔치 않다. 이런 약점은 대통령과 청와대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김무성 대표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헌정사에서 권력기관의 독립성을 지켜주려 가장 애썼던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런 원칙을 지키려다 모진 수모까지 당했다. 권력기관 독립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조차 낯설게 받아들이는 한국사회의 수준과 세련되지 못한 개인적 스타일 때문에 그의 짧은 정치 실험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가 떠난 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소양이 부족한 두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삼권분립은 과거로 퇴행했다. 단절이 길어질수록 복원은 그만큼 힘들어진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은 법률조항이나 제도가 아닌, 의식과 정치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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