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우씨, 파란만장한 아버지관한 글 LA 타임스 기고
미국으로 이민온 뒤 온갖 고초를 겪다가 지난 96년 뉴욕에서 세상을 뜬 한 한인의 아들이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2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기고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다음은 현재 한국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오정우씨가 아버지의 한을 서술한 기고문이다.
"96년 1월 뉴욕에는 10여년 만에 최대 폭설이 내렸고 아버지는 집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길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주머니에는 2달러가 들어 있었다."
내 생애 마지막으로 관 속에 모신 아버지의 손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끝에 베인 자국들이 선명했으며 뜨거운 스팀에 덴 화상자국도 있었다. 드라이클리닝때 독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느라 손톱 색깔은 바래 있었고 손바닥 곳곳에 군살이 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예전엔 너무도 부드러웠는데라고 말했다.
아버지 시신은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그의 손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공통적으로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한국의 최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고위 간부직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86년 어렵사리 세 자식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렵사리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86년3월 우리 가족은 뉴저지에 도착했다.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뒤바뀌라고는 거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갖고 온 돈으로 교외의 한 괜찮은 집을 샀으며 생활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회사도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으면서 살림살이는 급격히 쪼들렸다.
미국인 고용주들은 아버지가 미국경험이 없다, 한국내 경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수십장의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은 몇군데에 불과했다. 결국 아버지는 뉴욕 빈민가인 할렘 근처에서 카드판매점을 시작으로 맨해튼에서 의류공장, 96년 생을 마감한 비좁은 집(아파트)이 있는 퀸스에서 세탁소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 일했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제외하고는 휴일이 없었다. 7시부터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세탁소의 열기는 여름에 참기 어려웠으며 유독물질로 인명피해도 있었다. 아버지는 늦은 밤 녹초가 돼 귀가했다.
그럼에도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열심히 일한 대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산더미같은 빚과 강압적인 채권자, 권총강도, 수치심, 차별, 따돌림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96년 1월 폭설이 내린 뉴욕 동부 퀸스의 한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가 아버지와는 마지막이었지만 그의 손에 담긴 자취를 내 기억 속에 새기지 않고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낼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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