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금년 3.1절의 절기(81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8.15후 해마다 맞이하는 3.1절은 55번째이니 그래도 갈라진 땅덩어리에서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민족의 명절로 지내오곤 한다.
이 절기를 맞이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일제의 강점 아래서 한데 뭉쳐 자유독립의 열기와 만민 평등 사회와 인류평화를 위한 거센 민족의 큰 운동을 되새기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제의 감옥 안에서도 독랍만세를 불러 더 심한 매질과 극도의 잔악한 고문을 감수했던 작은 외조부님(西愚 李錫)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형님(東愚 李鋒)과 더불어 1910년을 시작으로 만주와 지나(支那)에서 한국의 자주적인 조국 광복 독립운동을 전개한 분이다. 형님은 한때 유화현에 있는 신흥 군관학교를 운영하였고, 해외동포들의 화합과 자활책, 외교활동, 농민 호조사 설립 운영, 독립운동 기지와 독립군 양성, 3.1운동 직후 임정 산하의 재만 부력단체 통일기관인 대한 광복군 창설과 무장독립운동 등 실로 여러 방면에 걸쳐서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다.
또한 1918년과 1919년 초 만주 통천에서 해외와 국내의 동지들과의 3차 모의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키로 의결, 국내 동지들과 연락, 3.1운동의 촉성역을 담당하였다. 그이도 형님을 따라 여러가지로 같이 일을 해오던 중 1919년 3.1운동을 기하여 형님이 인솔한 동지들과 같이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선언문과 격문 등을 나누어 주는 일방, 퇴색된 독립문을 새로 칠하는 등 그리고 역적 암살을 기도, 기회를 노리던 차 발각되어 각기 국경을 넘어 광복군영으로 무사히 복귀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민족독립을 하다가 동족의 밀고로 국내로 잡혀와 형을 여러번 겪은 분이다. 끝내는 그렇게 건장하던 분이 제 명을 제대로 살지 못해 8.15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때 감옥에 같이 있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로는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사로서 호가 났던 분이라고 했다. 8.15 후, 마음대로 3.1운동 당시의 만민평등, 자유, 자주 독립을 위한 거족적 운동의 감회와 각성을 만끽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들의 한도 우리는 되새겨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는 한때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를 다녔고 졸업을 석달 앞두고 형님의 부름을 받아 지나로 건너가 그곳서 군관학교의 체육과와 폭탄제조의 속성과를 나와 장차의 무장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은 분이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나라 잃은 백성들의 갈 바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그이는 또한 자기가 할 바를 다했던 분이고 이름과 명예는 도무지 생각하지도 않던 분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남은 가족이 곤궁한 형편으로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없었지 않았는가 한다.
그는 간악한 일제의 쇠사슬에서 피 압박 민중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자기의 일신상의 영달과 이익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몸소 실천한 분으로 말만으로만 끝내고 자기 명예와 이름만 내길 좋아하며 자기 몸보신만 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하나의 산 표본이라고 생각되며 3.1절의 의의도 그런 데서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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