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닷새동안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딸아이는 학기 중이었고, 세살배기 아들녀석은 엄마 없이 혼자 잠도 못 자던 때였으므로 온가족을 떨치고 친구들과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나를 다들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무리를 한 여행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전부터 우리의 대단한(?) 우정을 잘 알고 있는 남편과 어머니의 지지 속에, 또 딸아이에게는 엄마에게도 가족외에 중요한 인간관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기회라고 다짐해가며 서울행을 강행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흔들흔들, 편치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날아간 나도 나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다 무리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사인 친구는 하루를 병원 문을 닫았고, 무릎 인대를 크게 다친 친구는 기브스를 겨우 풀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더군다나 어린이날이 겹쳐서 모두 어린이인 자식들은 남편들에게만 일임한 터였다.
단발머리 나풀거릴 시절부터 모든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한 우리 여덟명의 친구들에게 지난 몇년은 참으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친정쪽 시댁쪽해서 부모님이 네분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분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으며, 그 중 둘이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얼굴이 스무 살 처녀처럼 말간 한 친구는 두 딸을 낳고 칠년만에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기 한달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덜커덕 세상을 떠버렸었다. 그 때, 만삭의 배를 해 가지고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울던 친구의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가슴에 박혀 있다고, 그 때를 얘기할 때마다 지금도 친구들은 목이 메곤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가 제일 걱정하고 안타까워 눈물 흘린 것은 아픈 친구 때문이었다. 유능한 치과의사로, 두 아이의 엄마로, 어려서부터 도무지 빈틈이 없는 그 친구가 임파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7년 전이었다. 폐에 물이 차서 가슴 위쪽으로 구멍을 내어 튜브로 물을 빼내기도 하고 비장이 파열되기도 하는 힘든 상황 중에서도 약물치료가 잘 되었었다. 그리고 우리가 제주도 행을 감행한 그 때에는 병이 재발되어 치료중일 때였는데, 친구는 핏기 없는 얼굴에 어울리는 가발을 예쁘게 쓰고 여행길에 올랐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의 2박3일은 정말 그 모든 무리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게 좋았다.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예전에 들르지 못했던 몇 곳만을 슬슬 구경했는데, 비자림은 때맞춰 내리는 가랑비 사이로 너무도 꿈결 같았다. 미국의 풍성하고 힘이 뻗치는 나무만 보고 살다가 수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가녀린 줄기를 하늘로 올리는 모습들이 마음속 바닥 어딘가를 자꾸 건드리곤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의 이편저편을 넘나들며 각자가 감당한 만큼의 세월을 풀어놓을 때는, 다 알던 이야기도 새삼스런 무게로 차 올라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며느리도, 아내도, 엄마도 아닌 오로지 자기로만 보아주는 친구들 곁에서 서로서로 수고했다고, 위로해주고 보듬어준 그 며칠 간의 추억이 지금도 그렇게 마음 든든할 수가 없다.
서울에 30년만의 폭설이 내렸다는 날 저녁, 30년 단짝 친구가 기쁜 소식을 전화로 알려 주었다. 첫째는 몇 달 전에 다시 자가 골수이식을 하고 6주를 무균실에서 그 무시무시한 치료를 받은 친구가 이제 다시 자기 병원에 나갈 만큼 건강해졌다는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세 아이의 엄마인, 지난해에 동갑내기 거의 총각이다시피 한(?) 의사와 재혼하여 유복자 아들이 아빠소리를 실컷 하게 해주었던 또 다른 친구가 며칠 전 네번째 아이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마음이 홀가분하고 또 너무 기뻐서 길게 길게 수다를 떨었다.
느끼는 만큼 사는 것이라 했던가. 어느 누구에게도 삶에 기쁨만이 혹은 고통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싹이 숨겨져 있는, 우리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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