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있은 제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남과 북 가족이 만났다.
북에서 온 아들 구인과 남쪽의 형 구관, 여동생 구원이 50년만에 만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기구한 가족의 삶이다 하는 것은 잠시, 북의 아들은 아버지가 북으로 가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미군 비행기 기총 사격으로 사망했다 하고 남의 가족들은 9.28 수복 때 평양으로 이감돼 미군의 평양 폭격으로 죽었다고 하니 한 아버지, 한 자식의 주장이 각기 달라 언론 보도를 접하는 우리도 당혹스러웠다.
확실한 것은 1980년대 후반까지 남측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를 부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월북 시인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교과서에도 정○용으로 표기되고 아름다운 그의 서정시는 읽을 수도 지닐 수도 없었다.
80년대 후반 월북 작가 해금조치로 정지용은 제 이름을 찾았고 그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북한 관련 출판물들은 우리가 몰랐던 사실과 인물들을 속속 알려주었다.
정지용의 서정성과 맥을 같이 하는 시인 백석(白石)(본명 백기행)의 존재는 ‘우리 문학의 북극성’, ‘소월 이후 평북이 낳은 천재시인’이라는 칭호를 달고 87년 10월 그의 시 전집을 출간시켰다.
이후 그의 연인 ‘자야’가 나타나면서 백석의 시와 생활은 더욱 또렷이 우리들에게 찾아왔다. 본명 김영한, 백석 시인이 지어준 아호 자야(子夜)라는 여인은 국립도서관으로 그의 시집을 보러 갔을 때를 에세이집 「내 사랑 백석 」 서두에 이렇게 묘사한다.
‘시집 「사슴」을 국립도서관에 찾아가서 대출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창구로 그 낡은 시집이 나타나자 백석이 성큼 성큼 걸어나온 듯한 착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40여 년만에 뜨거운 포옹을 하듯 시집을 꼭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그리고 그날 시집 원문 그대로 모두 베껴서 돌아왔다는 그녀.
열 여섯 나이에 권번에 들어가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있던 청년시인 백석을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하고 서울 청진동에서 함께 살았으나 보수적인 시대와 신분 차이를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 반발,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한 것이 평생 다시 못보고 만다.
시인은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같은 시속에 그녀와의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남기고 여인은 8순 나이인 1991년부터 4년간 영탄조 문체로 22세 때 만났던 시인과의 이야기를 기록해 1995년 책으로 출간했다.
이 김 할머니는 서울의 대표적인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 주인이었고 노후에 70년대 공작정치, 밀실정치의 산실이던 그곳을 절 길상사로 바꾸었고 2년여 전 세상을 떠나며 1,000억 원에 달하는 대원각을 불교계에 기부했다.
얼마 전 퀸즈 공립도서관에서 이 책 「내사랑 백석」을 발견했다.
6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옛사랑을 얼마나 되새기고 곱씹으며 살았으면 하룻밤 꿈같은 사실을 어제처럼 그려낸 그 사랑이 진저리쳐지기도 하지만 감동적이기도 하다. 하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긴 하다.
지금은 정지용이나 백석 시집을 국립도서관에서 잠시 빌려 그 자리에서 베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가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북의 인물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남북 관계에 변화가 생기면서 하나, 둘 나타나는 이런 사람들, 먼 훗날 우리 역사에 소중한 별처럼 빛날 이런 인물들, 우리는 아직 정치사, 문학사, 음악사, 미술사 등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역사를 새로 쓸 일이 많은 것 같다.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남북 역사에 영향을 미칠 지는 더 두고 볼 일이며 북미간 타협의 길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한반도 냉전 종결도 미지수이다.
남과 북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한국의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우리들의 서재에 꽂히는 책도 달라진다는 것이 때론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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