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일본 동경으로 출장 간 적이 있다. 그때 가본 두 곳이 요즘의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과 맞물려 머리에 떠오른다.
한 곳은 주군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한 뒤 전원이 할복자살한 47인의 사무라이 혼을 기리는 절 쥬신쿠라(忠臣藏)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전성기인 18세기초, 조그만 지방 국가 아코의 젊은 영주 아사노 다쿠미노가미가 다른 영주 기라 고즈케 노스케로부터 모욕을 받자 젊은 혈기를 못이겨 칼로 빼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당시의 절대적 지배자 쇼군의 관저 안이었고 부상을 입은 영주 기라는 쇼군의 절대적 총애를 받던 인물이어서 아사노는 할복을 명령받는다. 뿐만 아니라 아사노의 영지도 몰수되어 그 가신들은 갈 곳을 잃게된다.
이에 아코 가의 사무라이 47명은 오랜 세월 초야에 파묻혀 복수의 칼날을 갈던 중 눈이 펑펑 내리는 12월 어느 날, 원수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원수를 갚고 아무런 미련 없이 할복자살한다. 이 사건은 요즘도 수시로 소설, 연극, 가부키,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절을 안내한 가이드는 “일본의 혼이 깃든 곳”이라고 신이 났는데 우리 일행은 눈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자욱한 향불 연기에 우선 눈이 매웠고 그곳의 기념관에 진열된 치켜 올라간 눈을 부릅뜬 무사 영정과 서늘한 칼날이 휘어져 올라간 장도, 녹슨 갑옷들이 47인의 충성심에 탄복하기보다는 맨 정신에 일시에 배를 가른 그 잔인함이 놀라왔다.
또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나 절, 거리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군국주의 망령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수 십 년이 지났는데 가두 방송에서는 선동적인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선열의 애국 혼과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지금 일본에 전쟁 일어났어?”하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았을 정도로 극우주의자들의 모습이 낯설어 참으로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요즘 일본을 보면 47인의 무사가 살던 막부 말기와 같이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새 세기를 살아가려는 몸부림 같다. 경제 구조 해결책의 일환으로 국민들을 달래려고 자국민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역사도 ‘침략’이 아닌 ‘진출’로 미화하고 있는 가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에 재수정을 요구했고 분노한 한국민들은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초등학교 학생까지 시위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내셔날 파나소닉, J.V.C., 시세이도 화장품, 미림·간장 등의 조미료, 사시미·사부사부, 또 미국 아이들까지 매료시킨 일본 만화 영화나 게임을 얼마동안 사용 않고 먹지 않으며 안볼 것인가. 이것은 단기적인 일이다.
8.15 후 봉쇄되었던 한일간 문화교류가 94년 일본극단 내한공연으로 겨우 물꼬가 트였고 작년 4월 ‘차게 앤 아스카’ 잠실공연으로 대중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우 튼 물꼬를 다시 막을 필요는 없다. 일본과의 관계는 길고 넓게 보아야 한다.
그들은 불과 60여 년 전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고 종군 위안부, 강제 징용 등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기억하는 우리들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없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거늘’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일본의 미래를 망칠 뿐이다. 중학교 학생들이 자라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사의식이 생길 때 그들은 국제미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에게 역사의 빚을 청산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 그들은 결코 자신의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혹시 우리는 우리 역사를 홀대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자. 조만간 중학교의 국사 시간이 줄어들고 고등학교의 근현대사 시간이 선택과목으로 된다는 말은 왠일인지? 뉴욕의 한국학교에서는 한국사 시간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늘고 있는데. 자기 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세계사와 세계언어는 배워서 무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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