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T. S.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참된 삶의 의미를 망각하고 속되게 사는, 즉 정신적인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만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 시인 엘리어트의 4월만큼 사념적(思念的)이지는 않지만 나에게도 올 4월은 정녕 잔인한 달이었다.
4월 어느 날, 20여년 전 4월의 신부는 세월을 훌쩍 뛰어 초로(初老)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노던 길 라일락의 화무(花舞)에 취해 귀가한 날, 아내가 밤색 점액질이 든 접시를 내밀었다. 두발 염색약이라고 했다. 이마 위 흰 머리칼은 쉽게 물들이지만 그 뒤쪽은 혼자 하기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염색약을 들고 머리를 헤집다 가슴이 저려왔다. 흰머리가 많진 않다고 위로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언제 이렇게 하얀 서리가 내린 걸까.
당신은 도대체 머리도 안 쉬냐던 투정이 이해가 됐다. 그간 나 몰래 염색해왔음을 눈치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언제나 까만 머리칼이 염색약의 조화임을 깨닫는 것은 슬픔이고 충격이었다.
연애 시절과 결혼 후 한동안 아내에게 긴 생머리를 고수케 했다. 유난히 숱많고 윤기도는 긴 머리가 보기 좋았던 탓이다. 결혼 몇 년 뒤부터 아내는 긴 머리가 너무 불편하다고 은근히 불만을 표시해왔다. 들은 척도 않았으나 어느날 시누이들의 부추김과 응원에 힘입어 머리를 잘라냈다.
딴사람처럼 변한 모습에 화도 나고 심통이 생겨 한동안 ‘열무장수 아줌마’라고 놀렸다. 가정주부에게 긴 생머리는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짧은 머리가 아줌마 이미지로 굳어질 것 같아 부린 억지였던 셈이다. 아내의 헤어 스타일은 다시 생머리와 커트, 퍼머로 변신을 거듭하다 생머리와는 영영 이별했다.
결국 아내의 머리로 인한 충격은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그러나 올 4월의 놀람은 십수년 전의 그것과 강도와 성질이 달랐다. 매일 맞댄 얼굴은 세월의 흐름을 전한 듯 만 듯 했지만 흰 머리는 나이들어감을 단숨에 일깨워준 것이다. 아내의 머리 염색은 그간 별로 의식치 않고 살았던 내 나이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어느듯 지천명(知天命)의 시기가 지났음을.
십수년전 한국에서 방영됐던 ‘아직은 마흔 아홉’이란 연속극이 떠오른다. 극의 내용보다는 제목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은 마흔 아홉’이란 말에는 나이에 대한 인간의 미묘한 감정이 숨어 있다. 39세에서 40세가 되는 것과, 49세에서 50세가 되는 것은 비록 한 살씩 차이나지만 의미가 다르다. 50세는 어딘가 젊음의 끝이자 늙음의 시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직은 마흔 아홉’은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50이 안됐다”는 약간의 안도감을 먼저 깔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 시기가 곧 닥아 오겠구나”하는 초조와 불안이 뒤를 받치고 있는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을 것으로 여겼던 마흔 아홉은 물론이고 50도 껑충 넘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쓴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은근히 오기가 발동된다. 반 남은 술잔도 마음먹기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깨치기로 했다.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비관하기 보단 아직 반이나 채워져 있다고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특히 “하늘이 내린 사명을 알아차려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나이 ‘지천명’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때론 분수에 넘치는 호사도 누려보고 경우에 따라선 만용도 부려볼 작정이다. 어차피 내가 사는 내 인생, 너무 눈치보고 위축되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잔인한 달 4월에 가져본 갈짓자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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