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세상의 그 많은 사랑중에 사제애가 있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혈연으로 연결된 그 끈끈한 사랑도 아니면서, 또 서로 더 주거나 받지 못해 안달하는 남녀간의 사랑도 아니면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학창시절의 추억 갈피마다 잊지 못할 스승들이 계시다는 것에 문득문득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 출산을 경험한 여자들이 군대 이야기와 아이 낳은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할 말이 많아지는 것처럼 우리 모두 유년시절과 십대를 이야기할 때면 바로 어제인양 선생님에 대한 추억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선생님의 존함은 잊혀졌어도 그 떡판 12시 5분전 따위의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별명들은 몇 십년 세월을 뛰어넘어 그 시절로 되돌려 놓곤 한다. 그 때의 선생님들은 참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우선 당신이 담당하고 계신 학과목에 대한 지식면에서도 탁월하셔서, 조선 독립선언문 같은 것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좔좔 외우셨는가 하면, 동서고금의 중요한 연대가 거의 반사적으로 나오셨고, 칠판을 보지 않고 그것도 왼손으로도 한번에 세계지도가 그려지기도 했었다.
물론 때때로 예전에 사범학교를 나오신 많은 분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어릴 때부터 머리 좋은 걸로 한자락 하시던 당신들의 불운한 천재로서의 현실을 불만스러워 하는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교육자로서의 프라이드가 꼿꼿이 살아 있으셨다.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다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낮잠이 밀려 오는 5교시 수업에는 분필이 휭휭 날아 다니기도 했다. 큰 잘못 없이도 단체기합이라는 것이 많았고, 억지주입식 교육에 체벌도 왕왕 있는 일이었다. 때때로 여학생들 책가방이 홀랑 뒤엎어지기도 했고, 손톱검사, 속치마 검사, 일기장 검사까지도 있었으니, 지금 이 곳의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다 같이 미개인 취급받기 딱 알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왜 그렇게 선생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는지 박봉에, 한 반에 60-70명씩 되는 가지각색의 아이들에, 삼년내내 소매끝이 날긋날긋한 양복 한 벌로 지내시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생각할 줄을 몰랐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내 주시던 선생님, 합창대회 날 아침에는 날계란을 먹이시던 선생님, 잘 된 제자이야기에 만면에 희색을 띄우시던 선생님, 옆길로 가는 제자에겐 달래고 혼내고 때리고라도 포기 않으시던 선생님... 그 귀찮기만 했던 선생님들의 잔소리가 살수록 큰 가르침으로 우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학교 울타리를 한참 벗어나게 된 다음이니 선생님들께는 죄송하기 짝이 없다.
몇해 전 우연히 잡지에서 이제는 대학교수가 되신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때 아이를 낳고 수유중이시던 선생님이 쉬는 시간이면 남아도는 젖을 짜내시곤 했던 모양이었다. 그 버려지는 젖이 아까와 짠 젖을 컵에 담아 수업에 들어오셔서 창가의 화분에 주시곤 해서 그 화초가 더 잘 자라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남자였던 담임 선생님께는 비밀로 다 같이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인터뷰 기사에서 그래도 일선 중고등학교 교사였을 때가 선생으로 제일 행복했었다고 회고하고 계셨다.
문득, 남자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들이 설날에 세배 오는 친구 교사를 부러워 하시던 평생 여학교에서 보내신 할아버지 선생님도 생각이 난다. 아직 살아 계신지, 여전히 학교만 졸업하면 소식이 끊기는 여학생 제자들 때문에 서운해하고 계신지 궁금해진다.
갑자기 예전에 선생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르고, 옛 스승님들의 엄하지만 깊은 사랑이 그리워진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요즈음 한참 인터넷에 동창을 찾는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유행인 듯 하다. 옛 선생님들께도 소식을 물어물어 편지 한번 올린다면 얼마나 기뻐하실 것이며, 촌지교사로 얼룩져 떨어진 사도에 어깨 힘이 빠지신 선생님들께 작은 힘이 되지 않을런지.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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