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이 곳의 봄날은 따뜻하다 못해 무덥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엔 행사도 많다. 어린이날, 어머니날, 야유회, 결혼식 등으로 주말이 더욱 분주하다. 거기에다 우리 집은 남편의 생일과 결혼기념일도 들어 있어서 가정의 달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21년 전, 5월의 결혼식 날은 그 날이 남편 생일이자 석가탄신일이었다.
그때부터 남편 생일을 우리 식구끼리의 말로 ‘탄신일’ 이라고 한다. 내 생일은 성탄절 즈음이어서 나 또한 생일을 ‘탄신일’ 이라고 우기고, 우리의 결혼을 ‘거룩한 만남’ 이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결혼보다 더 오래된 일로 대학시절 5월, 학교 축제일인 메이데이 행사가 있었다. 단과대학별 합창제니 연극경연이니 전시회니 많았어도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파트너를 동반한 댄스파티였다. 학교 앞의 즐비한 양장점들은 축제용 옷을 맞추는 아이들로 문전성시였다.
파트너의 양복도 우리의 화제 중 하나였는데 멀미나는 중간색상의 옷을 입고 온 내 파트너의 의상은 합격점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잠깐 벗은 구두 속엔 이런 상표가 붙어 있었다. ‘구내화점’- 태릉에 있던 공대 캠퍼스의 양화점이라나? 그 후론 남자친구의 별명이 결혼할 때까지 ‘구내화점’ 이었다.
이곳의 오월은 활짝 핀 가로수의 꽃들과 함께 시작한다. 길가의 나무에 분홍 빨강 보랏빛 꽃들이 앞다투어 피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고 설렌다. 특히 보라색 자카란다는 나의 봄바람을 자극한다. 어디론가 꼭 떠나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을 주는 신비한 색깔의 자카란다.
마당에 장미도 만개했다. 물도 내키면 주고 가지치기도 안 해 주건만 탐스러운 꽃이 많이도 피었다. 옆집 잭 할아버지의 장미는 노랑 꽃잎에 주홍 바이어스를 두른 것이 사람의 눈을 유혹한다. 할아버지가 딸의 재혼식을 보러 며칠 비운 사이 옆집을 돌아봐 주며 한 송이씩 꺾어다 식탁을 장식했다. 몰래 따온 꽃이 얼마나 예쁘던지.
나는 꽃 욕심이 많아서 가끔 들르는 꽃시장에서 이성을 잃는다. 잔잔한 국화를 보면 비어있는 오지 항아리 생각을 해서 한단, 목이 긴 칼라는 우아해서, 프리지아는 향기에 반해서 마구 산다. 꽃시장 다녀오는 날은 무뚝뚝한 남편에게 한 소리 듣는다. "니, 점방 차리나?"
내겐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길거리에, 집 뜰 앞에, 프리웨이의 녹지대에 피고 지는 많은 꽃을 보며 꽃들의 수고를 생각해 본다. 물이 넉넉하지 않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을 뿌리들. 어둡고 굳은 땅 깊숙한 곳까지 더듬어 애써 끌어올린 수분과 양분으로 꽃을 피울 것이다. 화려한 장미도 소박한 들꽃도 무명한 꽃조차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꽃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아름다운 5월. 꽃처럼 살고 싶다. 땅 속 뿌리들의 긴장과 노력, 갈등과 엉킴을 묻어두고 작은 꽃 하나라도 피워 남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꽃들처럼. 말없이 도움이 되는 그러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우연한 것이 없다는데, 21년 전 사람을 짝 지운 절대자의 섭리를 음미하며 이 5월을 지내겠다. 지지고 볶으며 살아도 어린이날, 어머니날, 생일, 결혼기념일 등을 함께 지낼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축복인가?
자신의 생일선물과 결혼기념선물을 서로 비긴 것으로 하자며 남편이 슬쩍 넘어가도 이번엔 너그럽게 지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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