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자 오피니언란에서 뉴욕 조선족 동포협회 최동춘 회장이 쓴 뉴욕 조선족 동포들의 차별적 대우에 대한 기사를 읽고나니 이민초기에 우리 민족의 애국자이며 이민의 선구자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민 초기에 미국에 와서 솔선수범하며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 나중에 건전한 한인사회를 형성한 사실들에 대하여 일부나마 소개하는 것이 우리 이민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몇자 적어보고자 한다.
도산이 1902년 당시 24세의 젊은나이로 구세학당의 후원과 할아버지가 단독으로 정해준 아내와 함께 미국행을 단행했는데 처음에 도착한 곳이 샌프란시스코였다.
이 지방에는 20여명의 한인들이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 행상을 하면서 남루한 생활과 퇴폐적인 생활을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자기 판매지역을 침범했다고 하며 길거리에서 서로 상투를 붙잡고 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학업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동포들의 화목이라고 생각하고 친목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이국만리에 와서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문명인 답게 살자며 먼저 몸차림을 단정케 하고 주위를 깨끗히 정돈하며 검소와 절제의 생활을 권장하며 자기가 몸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주며 비를 들고 동포들의 집을 청소해주고 밤에는 쉬운 영어와 예절도 가르쳤고 인삼장사들에게는 구역을 정해줘서 다름 사람이 남의 구역을 침범치 않도록 하였고 중국거리에 드나들며 주색잡기에 돈을 낭비하지 않고 돈을 저축토록 하여 이것이 한인사회에 본보기가 되어 그 지역사회에서는 한인들의 신용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또 도산선생은 도미한지 2년 후에는 LA의 리버사이드라는 귤 재배농장지역으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도 20~30명의 한인이 귤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균 한 개를 따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처럼 모든 한인에게 솔선수범하며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 귤농장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임금이 인상되며 생활이 개선됐다.
이렇듯 초기에는 이민생활이 평탄한 생활이 아니었다가 나중에는 이민의 선구자들의 올바른 인도로서 나중에는 인정받는 한인사회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지금의 고난이 자기 스스로 성실한 행동으로서 미래에 희망찬 한인사회를 이루어 이민 선구자들에게 부끄럼 없는 한인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미래를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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