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우리 민족의 상쟁으로 불행했던 50년 전의 그 날이 왔다. 지난 해에는 남북 정상들의 6.15 공동선언으로 1년 동안에 이산가족들이 소수나마 세 차례에 걸쳐 상봉했으나 지금은 그것마저 그치고 남북이 서로 경직된 상태로 있으니 이제는 부모형제의 상봉의 기회마저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새삼 지난 날 그 때의 일들이 생각난다.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자 모든 젊은 학생들을 군인에 동원시켰는데 나는 재빨리 낮에는 토굴 속에서 밤에는 집 뒷산에서 숨어지내니 나를 붙잡을 길이 없게 되자 어머님을 붙잡아 가 할 수 없이 어머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자수했다.
어머님이 나를 환자로 만들기 위해 내 넙적다리에 큼직하게 독초(일명 자라초)의 즙을 붙여 큰 상처(지금도 그 때의 기념물로 남아있음)를 만들어주어 평양의 모병소에 가서도 이 상처를 핑계로 전방으로 끌려가는 것을 연기 받았으나 다른 지방에서 온 젊은이가 잔등에 큰 상처를 만들어온 것이 발각돼 강제노동인 평북의 운산광산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허위증명서를 만들오 보초소를 무사 통과하여 도피한 후 집에는 도피한 사실만을 알리고 막바로 내 누님집으로 피신했다가 몇개월 후 그리운 부모님을 집에 남기고 홀로 대동강의 조그마한 나루터에서 사공이 숨겨놓았던 작은 고기잡이배에 초만원의 피난민의 승선으로 노를 젓지도 못하고 떠내려오는 물살을 따라 강을 간신히 건넜다.
강을 건너 황해도에 들어서니 큰 도로는 국군의 후퇴도로라고 하며 통제하여 해주로 향하던 중 사리원을 지나 미력이라는 곳(장수산 근방)에 왔을 때 난데없이 유엔전투기 2대가 나타나 우리 피난민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니 한 사람이 소와 함께 현장에서 숨지고 아기를 업고가던 여자도 죽었으나 등에 업힌 아기는 누구 하나 돌보는 사람 없었다.
그 때의 기총소사는 인민군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남하한다는 불확실한 정보의 결과였다고 하니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영토 내에는 또 다시 그런 쓰라린 전쟁은 없도록 남북 양쪽 지도자들이 서로 이해하여 화평한 사회를 지속시켜 하루바삐 흩어진 이산가족들이 서로 상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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