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내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사진이 한장 있다. 아버지 날이라고 딸아이가 용돈을 모아 한턱낸 썬데이 브런치를 얻어먹고 남편이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혼자 옛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결혼을 하면서, 또 미국으로 오면서 추리고 추린 사진들은 너무나 눈에 익은 것들이건만 유독 그 사진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신문사 정치부 기자를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으로 동분서주 바쁘던 삼십대 후반의 패기에 찬 젊은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시절의 아버지는 이미 생활이라는 것에 많이 지친, 당신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체념을 많이 받아들인 그런 나이셨을 것이다. 그 몇해 전 아버지는 땅 값이 싼 편인 수유리에 꽤 넓직한 땅을 사서 집을 지으셨는데, 일요일이면 아버지를 따라 집 짓는 걸 구경다녔었다. 아직 건물이 들어 서기 전의 집터며, 벽돌장이 아저씨들을 도와 일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다섯살 어린 내 기억의 단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내 유년의 뜨락이었던 그 집의 다락방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엷게 두근거린다. 다락방에는 아버지의 책들이 한쪽에는 책꽂이에 꽂힌 채로, 또는 상자에 넣어진 채로 쌓여 있었다. 조그만 창가쪽으로는 앉은 다리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때때로 아버지는 그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서재와 같았던 다락방은 어머니에게는 부엌이나 광에 두기에는 귀한 먹을 것의 비축장이었다. 쵸코렛이나 과자같이 우리에게 늘 꺼내 주어야 하는 것은 계단 바로 위쪽에, 오징어 같은 건어물, 경옥고 단지, 꿀병,인삼 같은 것은 조금 안쪽에 자리잡는 식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놀다가도 수시로 다락방에 올라가 혼자 고물거리기를 좋아했었다. 가끔씩 천장에서 쥐가 지나가는 소리에 놀라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곳은 아늑하고 포근했으며 비밀스럽기까지 했다. 몇년을 드나드는 사이에 내가 그곳에서 보고 만지고 했던 것들, 잉크병,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고받은 연애편지, 색실이 가득한 반짓고리와 옛날식 경대, 그런 것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해가 질 저녁이면 작은 창을 가득 채우던 노을의 아름다움, 푸드득 푸드득 떼지어 날아가던 새들을 바라볼 때 까닭없이 느끼던 슬픔 같은 것도 그 다락방을 배경으로 생생하다. 뜻도 모르면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은 것도, <대망>을 읽은 것도 그 다락방에서 였고, 빽빽거리는 동생들을 피해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운 곳도 그 다락방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내가 그 집에서 제일 좋아했던 곳은 초록빛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부터 집의 뒷담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던 꽃밭이었다. 폭이 2미터가 채 될까. 경계를 다이아몬드 모양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죽 붙여 만든 크지도 작지도 않은 꽃밭으로, 물론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것이었다. 아침이면 안녕하고 인사하던 나팔꽃, 여름내 굵은 대공위에 붙은 고개를 꼬아틀다가 마침내는 우리들 군것질거리로 씨앗을 내주던 해바라기, 어머니 음식치장에도 쓰이던 맨드라미, 붉은 빛이 어지럽던 사루비아, 그리고 작약과 다알리아, 글라디올러스까지 항상 풍성했던 꽃밭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름이 끝갈 무렵이면 백반에 짖이겨 손가락에 빠알갛게 물들이던 , 그래서 가을이 다갈 즈음이면 손톱끝에 초생달 모양으로 남아 시간의 흐름을 감지케 해주던 봉숭화도 있었다.
그 사진은 어머니가 찍어주셨던 듯, 꽃밭에다 조리로 물을 주고 있는 열살쯤 된 나와 그런 나를 빙그레 웃으며 보고 계신 아버지, 그리고 두 여동생이 같이 나온 스냅사진이다. 그 사진이 찍힌 그 여름날도 우리 자매들은 공기놀이를 하고, 퇴근하신 아버지와 베드민턴을 치지 않았을까.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화도 한창입니다. 그 노래 구절들이 사진 속 어디엔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아,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30년 전 사진 한장을 들여다 보며 혼자 가만히 눈물을 닦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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