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으로 생각할 때도 있어야”를 쓴(9월 7일자 오피니언 페이지) 이원일씨는 자신의 교회에 대한 부정의 논리를 종교개혁 이론에서 끌어온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교회를 욕하는 건(부정) 다르다. 종교개혁은 긍정속의 부정이요, 교회를 욕하는 건 투정속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긍정속의 부정은 자신이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기에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요, 부정속의 부정은 자신이 교회에 대한 의무도 사랑도 없이 떠들어대는 불평인 것이다.
교회를 욕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중세기의 종교개혁자나 성경의 예언자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 논조가 구약의 예언자들 처럼 비분강개하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항의문 만큼 지적항목이 다양하다. 하긴 역대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다. 구약의 개혁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소나 나귀만도 못하다고 신자들을 짐승 취급했다. 신약시대를 연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종교개혁의 원조인 예수님은 아예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나왔다. 그에 비하면 요즘 오피니언에 등장하는 교회 규탄의 목소리는 여간 부드러운 게 아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 분들이 교회 다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욕하는 사람들과 종교개혁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욕은 교회에 대한 평론이요, 오피니언의 평론은 교회를 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은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약이 되지만 욕은 교회를 망하게 하는 독이 될 뿐이다. 평론과 욕은 다르다. 평론은 전문가의 몫이요, 욕은 불평분자의 배설물일 뿐이다. 욕하는 걸 개혁으로 본다면 밤낮 짖어대는 미친 개야말로 가장 위대한 개혁자일 것이다.
종교개혁자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전문가이다. 개혁자들은 교회의 잘못만 보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은총과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마르틴 루터는 고행끝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95개조항의 비리를 걸고 나왔다. 이사야도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성령 체험을 받고 그 입이 거룩해지자 회개와 개혁을 부르짖었다. 참을 소유했기에 거짓을 규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크리스찬은 주일예배를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성경을 믿는 생활을 한다. 이게 신자의 의무다. 그런데 불평분자들은 주일예배 순례자들처럼 자주 교회를 옮겨다니고 십일조 내는 게 아까워 아예 미국교회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한다. 안면(眼面)이 지배(紙背)를 철(撤)하도록 눈에 불을 키고 성경을 읽지만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려는 게 아니라 어디 오류는 없아 하고 두리번거린다. 교회에 대한 의무는 제쳐두고 개혁을 주장하는 건 앞뒤가 안맞는 일이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대로 “교회는 계속 개혁돼야 한다” 종교 자유국가에서는 교회가 부패하면 자연스레 퇴출당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지금도 쉬지않고 걔혁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신학자가 있고 교단이 있고 교회제직회가 있고 교회언론이 있어 연구하고 평가하고 감시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원리는 긍정 속의 부정이어야지 부정속의 부정이 돼서는 안된다.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욕하는 건 개혁이 아니라 욕이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진정하고 교회개혁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내가 거듭나고 교회를 잘 받들고 은총을 체험하도록 노력하는 루터와 칼빈의 후예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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