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재일교포사회 취재를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그곳 한인가정의 보편적인 근심거리는 자녀 결혼문제였다. 2대, 3대째 일본에 살면서도 여전히 ‘교포’ 아닌 ‘한국 국민’으로 생각하는 1세들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혼혈이 너무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재 재일교포 사회에서 일본인과의 결혼비율은 80% 정도. 2세·3세로 넘어가면서 민족의식이 약해진 탓도 있지만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다. 본보 오사카지국의 한 기자가 설명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생김새 같고, 일본이름 쓰고, 일본말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구별이 안되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서로 한국인, 일본인인줄도 모르고 직장동료로, 대학친구로 사귀다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일본사회의 혹독한 차별, 그로인한 신분 감추기가 엉뚱하게도 혼혈을 확산시킨 결과를 낳았다.
재일교포 1세들이 진학, 취업, 사업허가등 매사에 차별이 극심한 일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는 것 또한 같은 이유로 가능했다. 본인만 입을 다물면 일본인과 구별이 되지 않아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부색 다른 미국에서 한인들이 우리말, 우리 이름을 쓰며 당당히 사는 환경을 부러워했다.
저마다 다른 얼굴, 다른 언어, 다른 전통의 세계 각국 이민자들을 차별두지 않고 품어 안을수 있는 것은 미국의 위대함이다.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법제도가 보호막이 되어 얻어지는 위대함인데, 그 보호막을 이루는 소재는 이 사회의 이성이다. 그래서 사회가 이성보다 감정에 휩쓸릴 때면 종종 보호막이 흐물흐물해지며 편견과 몰이해가 고개를 들고, 이때 다인종 사회에서 가장 쉽게 이질성의 증거로 드러나는 것은 ‘얼굴’이다.
2차대전때 일본인 얼굴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불경기가 닥칠 때면 이민자들의 유색 얼굴이 눈총을 받았으며, 이란·이라크등 중동과 전쟁이 있을 때마다 갈색의 아랍 얼굴들은 지레 죄인이 되어야 했다.
9월11일 테러의 주모자가 오사마 빈 라덴으로 지목된후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수염 덥수룩한 그의 갈색 얼굴은 미국민들에게 ‘악의 화신’이 되고, 그 비슷한 생김새가 분노 표출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슬람 사원, 학교, 아랍계 소유 비즈니스, 가정들이 협박전화, 기물파괴, 방화등 또 다른 테러로 시달리고 있다.
미국내 이슬람교도의 절반이 사실은 흑인이고, 아랍계의 대부분은 오히려 기독교도들이며, 그들 역시 이번 테러로 가족·친지를 잃은 피해자라는 세세한 사실들은 고려가 되지 않는다. 며칠전 방글라데시 태생의 한 여성이 뉴욕타임스에 이런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10년을 뉴욕에 살며 스스로를 뉴요커라고 여겼다. 그래서 남들 눈에 내가‘모슬렘여성, 이방인, 어쩌면 적’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전까지 나는 변호사, 페미니스트, 아내, 누나, 친구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테러리스트와 어딘가 비슷한 갈색 피부의 여성일 뿐이다. 여성인 내가 이럴 때 남성들의 어려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남성들은, 심하게는 목숨을 잃는다. 지난 15일 텍사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에서 3명이 총격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단 하나 공통점은 갈색 얼굴이었다. 그중 애리조나의 주유소주인은 시크교도로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수염만 길렀을뿐 아랍계도 이슬람교도도 아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살해된 이집트 태생 남성은 기독교도였다.
분노와 복수심에 들끓는 미국사회 분위기를 보며 불안하기는 한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랍계를 대상으로 하던 미움의 불똥이 이민자 전체로 확산되면 어쩌나”“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전력이 있는 북한이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그때 우린 어떻게 되는건가”등이 불안의 내용이다.
한국 보다 미국에서 산 햇수가 더 많은 데도 여전히 미국을 고향같이 느낄 수 없는 것은 어쩌면‘얼굴’때문일수도 있다. 소수계의 얼굴로 사는 미국생활은 아무리 잘해줘도 언제 책잡힐지 몰라 불안한 시집살이 같다. 우리의 ‘얼굴’이 다인종 사회에서 적대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한인사회가 평소 ‘얼굴 다듬기’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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