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부부 중창 팀에 끼인 우리부부는 가끔 특별 찬양을 할 기회가 있다. 그럴 때면 노래보다도 치장에 더 신경을 쓰게된다. 처음 시작 할 땐 공연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고 긴장도 했었는데 이젠 이력이 조금 붙었다고 무심해 진 편이다.
며칠 전 낮에 같은 중창 팀의 집사님 에게 전화했더니 미장원에 갔단다. 가게에 있을 시간인데... . 알아보니 다음날이 ‘무대에 서는 날’ 이라나? 우리 내외는 깜빡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집에 가서 염색을 해야 할 터였다.
새치가 일찍 나는 집안 내력의 나는 벌써 전에 머리 염색을 시작하였다. 친정아버지는 40대 초반부터 거의 백발이 되어 다니셨다. 하지만 나는 흰머리가 내력이 아니라 고생한 탓이라며 우기고 산다. 그래야 내가 늘 하는 타령과 일맥 상통 하겠기에 말이다. 이제는 남편과 아이가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내가 유학생 마누라로 이곳에 와서..."로 시작하는 나의 주제가가 있다.
남편은 나보다 덜 한 줄 알았는데 이번에 염색을 해 주다 보니 흰머리가 무척 많았다. 흰머리는 많아도 참겠는데 주변머리 빠지는 것은 못 참는다고 말했다가 둘이 배를 쥐고 웃었다. 마음먹은 대로 될 일이 아니기에 말이다. 설명서대로 7분만 두면 될 걸 신문 보느라 10분이 넘었는지 남편의 머리가 너무 검게 나와 버렸다. 염색 안한 편이 더 나았을 정도로 검은 베레모를 얹은 것처럼 어색했다. 몇 번을 감아 다시 물을 빼느라 시간과 기운을 쓰는 걸 보니 우스웠다. 쓸데없는 데에 진을 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창단이 노래만 잘 하면 되지 누가 우리의 머리칼에 신경이나 쓴다고. 본말이 전도 된 일들이 주변엔 너무도 많다.
올해처럼 다사다난 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해도 없었다. 미국은 테러와 보복 전쟁으로. 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개인적으로 볼 땐 올 봄에 아버지의 소천, 여름엔 강도를 만나고, 가을엔 친한 친구를 하늘로 보냈다. 내가 속한 교회와 단체들에서는 일년 내내 보고 듣고 말할 것이 너무 많아 멀미나는 한 해였다.
그런 와중에도 감사절을 보내고 성탄절을 보내니 한해가 벌써 저물었다. 며칠 있으면 새해가 올 것이다. 사실 해가 간다거나 온다거나 하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한다. 해는 불변한데, 사람이 변해 가는 것이라고 들었다. 아무리 파워 있는 사람이라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늘어나는 흰머리와 함께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세월은 간다. 세월 따라 변해야 한다면 이젠 자연스럽게 살고싶다. 새해엔 머리가 희면 흰 대로 두어야겠다. 흰머리를 수용할 수 있는, 백발이 어울리는, 여유로움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동창회의 송년모임엘 모처럼 갔었다. 무슨 말을 하던 귀결은 남녀 상열지사?로 몰고 가는 사회자가 미웠다. 그래서 그 쪽에는 신경을 아예 꺼 버리고 우리만의 이야기로 웃음꽃 을 피웠다. 우리들은 더 이상 남녀의 성적인 이야기엔 두근거릴 청춘이 아니었다. 어느새 40대의 중반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어있었다. 그날 우리들 수다의 주제는 ‘흰머리’ 와 ‘노안’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들 프로그램을 십리나 뻗쳐 멀리 보고들 있었다.
나이가 먹은 증거인지 새해에 대한 큰 기대도 설렘도 많이 줄었다. 갈수록 세월이 가속도가 붙어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는 세월이 반갑다기 보다는 가는 세월을 더 붙잡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이 먹기를 싫어하는 이들도 올해만큼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것이다. 마지막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갈아 달면서 조용히 말하련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모든 이들에게 송구영신, 근하신년을 전하면서 이해인 수녀의 ‘12월의 엽서’ 구절을 인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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