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4주간의 논산 훈련소 신병훈련도 거의 끝나고 자대로 배치받을 즈음이었다.
기간병들이 모두 사라진 가운데 장교 한 명이 나타나더니 소원수리를 받겠다고 했다. 보안대에서 나왔다고 말한 그 장교는 "훈련기간중 있었을지도 모를 부조리를 없애고 후배들에게는 보다 나은 군생활을 위해 기탄없이 적어달라"며 무기명으로 쓰는 설문조사서를 돌렸다.
이틀 후면 훈련소를 나선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개선해야될 사항들을 적었다. 기진맥진한 훈련병들을 시켜 기간병의 양말을 빨게 한다든지, 훈련병에게 돌아올 고기를 기간병들이 먹고 ‘돼지가 헤엄쳐 지나간 듯한’ 국물만 마시게한다 든지… 말 그대로 ‘사심 없이’ 후배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훈련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가지를 적었넣었다.
문제는 오래지 않아 터졌다. 그 장교가 설문지를 회수해간지 몇시간이나 지났을까? 얼굴이 분노로 가득찬 중대장이 기세등등한 기간병들을 데리고 훈련병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훈련기간중 비리를 적은 설문지 10여장을 뽑아들고, "이것을 적은 X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고함쳤다. 아무도 나갈 리가 없었다. 모진 단체기합을 받은지 3시간, 거품을 토하고 쓰러지는 병사가 나올 정도로 반 죽음이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내가 썼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설문조사한 장교는 보안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진짜 소원수리에서 부조리를 적을까봐 미리 단속에 나선 같은 부대의 장교였다.
이 사건은 젊은이로서 정의감에 불탔던 기자의 사회관을 여지없이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그후 앙케이트나 설문지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은 저의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인구조사나 의료보험 혜택 이용실태 조사 등 각종 센서스에 나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한인들은 무기명으로 비밀이 보장된다고 해도 조사를 꺼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2000년 센서스 결과가 발표됐을 때, 미국내 한인 인구는 불과(?) 1백10만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동안 2백만이니 2백50만이니 하고 과시했던 한인들이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유학생이나 단기 체류자는 물론 불법체류자까지 센서스에 응답해도 전혀 불이익이 없다고 해도 이를 믿는 사람이 드문 것이 한인들이다.
기자가 만난 한 한인은 "초등학교때 교실에서 도난사고가 나자 교사가 모두 눈을 감게하고 솔직하게 손을 들면 용서해준다고 해서 손을 든 친구가 당한 곤욕을 보면서 평생 절대로 속마음을 함부로 보이기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숙제로 내준 일기를 솔직히 썼다가 부모와 교사로부터 꾸중을 들은 일이 있다"면서 "그후로는 누군가 볼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기를 꾸며서 쓰게됐다"고 고백했다.
"직장 상사와 정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 사람도 보았다.
인구조사에 집계된 한인의 숫자가 적어 카운티가 펴내는 서류중 소수계 언어로 한국어는 베트남어는 물론 아프가니스탄어에까지 밀리는 현실이다.
센서스가 있을 때마다 언론과 봉사단체가 나서 한인들의 참여를 호소하지만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투표후 출구조사가 틀리기로 유명한 나라가 한국이다.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을 물으면 속마음과는 달리 질문자의 성향을 분석해서 대답해주는 것이 일부 한국인의 슬픈 단면이다.
억압과 왜곡된 사회구조에서 성장한 한인들은 미국에 와서도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감추려 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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