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 <리맥스 100 부동산 대표>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고 있었다. 웬 남자가 다가와 ‘떼~아밍쿠?’ 하고 묻는다.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쳐다보니 손뼉을 다섯 번 짝짝 치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코리아 넘버원!’ 하고 씩 웃었다.
지난 6월, 파리와 런던에 잠깐 있었을 때도 그랬다. 예전 같으면 그저 흘낏 ‘아 저기 웬 동양여자가 하나 있나보다’ 하거나 혹은 ‘일본사람인가?’ 먼저 묻고 ‘그럼 중국사람?’ 순서로 관심을 보이던게 거진 다였는데 이번엔 ‘아 유 코리안?’부터 묻기 시작하고 지금이 어느 땐데 왜 한국에 안 있고 여기 있느냐며 친근하게 말들을 건네 왔다.
그저 구석에서 눈에 안 띄고 가만히 ‘노란 얼굴의 한 동양여자’로 있으려는 사람을 화제에 끌어넣으려고, 일본은 월드컵 경기를 개최(holding)했을 뿐이지만 한국은 월드컵 축제를 주최(hosting)한 거라고 비교분석까지 해가며 땡큐 코리아를 연발하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한 것 없는 나를 쑥tm러우면서도 으쓱하게 만들었다. 한국과 경기를 벌였던 날의 해설자는 ‘열 한명의 팀과 시합을 하는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상대로 하는 시합같다’고 응원단의 열기를 경탄하기도 했다.
16강까지만 가봐도 좋겠다던 바램은, 이러다가 결승까지 진출하는게 아닌가 하는 즐거운 걱정을 넘어서, 혹시 우승 못하면 어쩌지 하는 야무진 꿈까지 부풀게 했으니 선수단의 기량도 대단했건만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감동은 우리 국민의 모습에서였던게 틀림없다. LA에 돌아오니 우리 회사 외국인(아니, 내국인) 동료들도 한국응원단과 함께 밤샘 현장에 동참하고는 ‘축구 챔피언은 브라질, 그러나 이번 대회의 진정한 최우승자는 한국인’이라고 덩달아 기뻐했다.
(이러는 바람에 지각·하품·낮잠·업무부진 다 눈감아 주고 점심저녁 회식비 지출만 팡팡 늘어난 사장님들이 타운에 수두룩하다는 것은 여담이고, 일부 업소를 빼곤 오전은 오전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손님의 발길이 끊겼는가하면 야간 작업을 해야 하는 직종은 결원을 보충하려고 아무리 구인광고를 내도 문의전화 한통 없었단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선 새벽기도 신자가 아무도 안 나오는 바람에 목사님 내외분만 예배를 보시기도 했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한국사람. 우리가 그렇게 훌륭한 국민이었나? 한달 내내 TV화면을 붉게 물들였던 저 뜨거운 결집력이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진짜 우리의 힘이었던가? 무엇엔가에 의해서 지축을 박차고 솟구쳐 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큰 새의 알같은 민족이었나, 우리는?
마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무엇이 될 수 있을 것같은 뭉클함. 내게 조국이 있다는 감사함. 저 형제들과 핏줄과 얼을 함께 나누어 가졌다는 뿌듯함. 그리고 이렇게 먼 땅에 민들레 꽃씨 한톨처럼 떨어져 질기게 뿌리내리려고 힘겨운 나날의 삶. 이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한국남자들을 새벽마다 울게 만든 모국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좋은 옷 좋은 차를 가졌든 못가졌든, 어찌해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늘 접혀져 있던 아이들도 붉은 티셔츠에 태극기를 펄럭이면서 ‘오! 필승 코리아’를 목 터져라 외치며 자랑스레 거리를 누볐다.
이제는 7월. 축제는 끝났다. 7월4일을 나라의 생일로 축하하는 미국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들의 선조들이 2백여년전, 지금 우리처럼 이민와서 뿌린 씨대로 거두고 누리면서 사는 다민족 속에서. 종족에 따른 편견을 절대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게끔 제도적 장치가 돼있어도, 어느 나라 사람은 어떻고 어느 인종은 어떻다고 각자의 평판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그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2002년 6월 한달동안만, 한인타운 안에서만 기펴고 살게하려고 온 이민이 아니다. 3세, 4세, 필경은 우리가 한번 안아도 못 볼 그 후대의 아이들까지 ‘대 한국인’의 핏줄을 지난 6월처럼 벅찬 자부심으로 안고 살아가게 해줄 수 있을지 아닌지.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오늘부터, 우리하기에 달렸다. 고치고 바뀌어야할게 무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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