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히피문화’의 대변자를 자처하던 아이라 아인혼이 드디어 필라델피아 법정에 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에겐 그의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다. 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한 히피문화의 선두에는 늘 그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9년, 아인혼의 집 옷장에서 신문지와 스태이로폼에 싸인 채 미라가 되 버린 실종여성 헬렌 매덕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인생은 어둠 속으로 잠복하기 시작했다.
해박한 지식과 매끄러운 화술, 거침없는 행동과 분방한 여성관계로 주변에 유명 인사들을 몰고 다니던 그의 몰락은 ‘홀리’라는 애칭을 지닌 텍사스 출신의 금발미녀 헬렌 매덕스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홀리와 아인혼은 1972년에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교인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교양강좌 강의 도중 마리화나를 피우고, 옷을 벗어 던진 채 춤을 추는 등 심한 기벽을 일삼던 아인혼은 여성에게 그리 자상하지 못했던 듯 싶다. 숱한 여자들과 관계를 맺은 그는 이별을 원하는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코카콜라 병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홀리의 케이스는 최악이었다.
1977년 8월,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기운 홀리는 그에게 결별선언을 한 후 실종됐고, 79년 3월28일 그의 옷장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살인혐의로 검거된 아인혼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인맥을 총 동원하여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평소 아인혼을 아는 이들은 아인혼의 결백을 믿었고, 그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중에 상원의원에 당선된 알렌 스텍터가 아인혼의 변호를 맡았으며 보석금 역시 살인혐의자에게는 너무나 낮은 4만 달러에 책정됐다.
그러나 보석금을 내고 나온 아인혼은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인 1981년 1월 해외로 도주했다.
증인들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필라델피아는 1993년 특별법을 제정, 아인혼을 결석재판에 회부했고 배심원들은 그에게 종신형을 평결했다.
유럽을 전전하던 ‘도망자’ 아인혼은 1997년 6월13일. 프랑스의 소도시 보르도에서 금발의 스웨덴 여인과 동거하다 현지 경찰에 검거됐다. 자신의 이름이 유진 말론이라고 우기던 이 남성은 지문조회 결과 아인혼으로 판명됐다.
아인혼 검거의 일등 공신으로는 필라델피아 경찰 리차드 디베네데또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가며 유럽의 연락망을 총 동원, 16년만의 끈질긴 추적 끝에 아인혼의 소재 파악에 성공했다.
검거된 아인혼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데에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프랑스 정부는 범인인도 재판에서 미국의 법적 절차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아인혼의 프랑스 변호사는 그를 다시 미국으로 보내는 것은 인권유린이고 주장했다. 궐석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하는 미개한 나라로 아인혼의 신병을 인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인도적이라는 논리였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4년여의 재판과 항소 끝에 미국에서 아인혼을 다시 재판정에 세운다는 조건으로 범인 인도에 합의했다.
20여년 전 O.J. 심슨 사건만큼이나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던 아인혼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기억도 흐려졌고 흥미도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헬렌 ‘홀리’ 매덕스를 기억하고 그녀를 사랑했던 가족들은 이 재판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지난 25년의 세월을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