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태수 김흔은 일가친속을 거느리고 양양땅 낙산사에서 몇날을 휴식하게 되었다. 부엌에서 반찬을 마련하던 채공 담당자 조신스님은 문틈으로 몇 번 본 태수의 딸에게 혼을 빼앗겨 낙산사의 관음보살에게 나아가 둘이서 맺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날마다 달마다 기도를 드렸다.
그 지극한 기도정성은 애절함을 다 했지만 어찌하랴 풍문에 들은 소식은 그 소녀가 시집을 간다는 사실이다. 조신 스님은 너무도 충격을 받아 영험없는 관세음 보살 전에 엎드려 원망과 한숨을 토하고 눈물로 마루 바닥을 적시며 슬퍼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사모하던 아가씨가 꿈에 찾아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도 속으로는 스님을 사모했지만 속가의 몸으로 그렇게 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스님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자 찾아왔으니 받아 주소서 하였다. 원하고 원하던 일이라 조신 스님은 그 처녀와 함께 고향으로 낙향하여 부부가 되고 사십년에 걸친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의 고통은 누구도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인지 이 상사의 부부도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니 자식 다섯을 거느리고 사는 동안 이집저집의 막일은 물론 유리 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열 다섯 살 난 큰 아들은 이 와중에 굶어죽는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열 살난 딸이 밥을 빌다가 큰 개에 물려 피를 흘리며 돌아왔을 때는 같이 흐느껴 울었다.
삶의 고통이 이러하고 보니 애정은 멀어지고 원망만 쌓이게 되어 문전 걸식의 오욕과 수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부인은 헤어질 것을 호소하게 되었다.
젊고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웃음은 풀 끝의 이슬같이 사라지고 향기롭던 그 기약은 한갓 헛된 꿈이 되었으라. 조신과 그의 부인은 아이들 둘씩을 나누어 가지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너무도 슬프고 고통스러워 통곡을 하면서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관세음 보살전에 놓인 촛대의 불빛도 쇠잔하고 밤은 깊어 가는데 꿈에서 깨어난 조신은 넋이 나가 등신이 된 듯 망연히 앉아서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벽 예불 종소리에 뜰 앞에 내려선 조신 스님에게는 이제는 더 이상 인간 세상에는 뜻이 없었다. 애욕의 마음이 얼음 녹듯이 사라지고 번뇌는 그 뿌리가 뽑힌 듯 하였다. 관세음 보기가 부끄러워 참회의 념을 금하지 못한 채 불전에 엎드려 백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꿈에 아들 묻은 곳을 찾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돌미륵을 깨끗이 씻어 모시고 정토사를 세우고는 깨끗한 마음 땅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가기를 한 마음으로 발원하고 기도하며 살았다. 평생을 단 한 발짝도 깨끗함에서 물러나 본 적이 없는 조신대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하루밤 잠깐의 꿈으로 사십년 인생의 애욕무상을 깨달은 조신대사를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낙산사의 관음상을 친견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는 진실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또는 진실하게 살아갈려고 애쓰고 있다. 약속을 잘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성실한 삶을 살고자하며 열심히 살고자 한다. 이것이 최고의 진실한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하지만 중생의 진실일찌라도 무상 속에서는 힘없고 빛 없이 묻혀 버리고 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태도일뿐 진실 그 자체가 아님을 깊이 인식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인생은 긴 꿈이다. 마루에 잠깐 엎디어 꾸는 짧은 꿈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꿈인줄을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허덕거리며 전도 몽상으로 산다. 쓸쓸한 일이다. 깨끗함을 길이 기약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 관음의 대자대비에 의지해서 정토의 삶은 잠시 빌어본다. 부디 이 사람도 정토에 나게 해 주소서. 법당을 나서면 뜰에 천년 고탑이 서 있다. 칠층석탑이다. 석탑을 몇 번 돌아보다가 옛 향기스런 돌담을 짚으며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돌아 나온다.
거칠 것 없는 망망대해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의 누각에 올라 한식경이나 동해바다와 눈을 맞춘다. 다시 해수욕장 쪽을 바라보면 가을 바다를 많은 청춘남녀들이 걷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지금 상사의 꿈을 맺고자 하는가 꿈속에서라도 상사를 이루고자 함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삶들에 대하여 미소를 보낸다. 내가 번뇌를 버리게 되면 깨달음이 되겠지만 번뇌가 나를 버리게 되면 나그네의 자유로움이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방랑으로 자유를 찾을 몸도 되지 못하여 의상대를 뒤로 할 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씁쓸히 한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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