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신문의 스포츠란에서 복싱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두 사람이 맨몸으로 링 위에 올라가서 거의 맨 주먹에 가까운 모습으로 싸우는 가장 원시적인 경기.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경기라고 말해지던 권투가 이젠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 때는 지금의 프로야구이상으로 지면을 장식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나 배운 것이나 기댈 곳이 없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몸뚱이 하나만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을 찾아 모여들던 곳이 권투도장이었다. 그래서 권투를 ‘헝거리스포츠’라고 했다. 이제 더 이상 배고프지 않는 시절이기에 헝거리스포츠가 시들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배고픔이 없어진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배고플 때의 심정과 배고픈 자의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까지 없어진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3D업종이 외국노동자들로 채워져 가는 반면에 온 몸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인간승리의 드라마
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편안함은 쉽게 천박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시대가 되새겨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얼마 전에 ‘챔피언’이라는 영화로 나왔다. 1982년 11월 14일 라스베가스 시저스펠리스 특설 링에서 WBA 라이트급챔피언타이틀 매치를 벌이다가 레이 멘시니에게 14회에 K.O.패 한 후 숨졌던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이야기다. 나는 그 때 T.V. 중계로 이 경기를 보다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승산이 없다고 보았던 그 시합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파이팅으로 싸웠던 김득구의 투혼과 그 장렬한 죽음이 오랫동안 기억에 각인 되어 있었기에 영화 ‘챔피언’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련한 흥분이 있었다. 태평양을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나는 그 후에 방해받지 않는 분위기에서 다시 보고 싶어서 비디오로 나온 후 몇 번을 되돌려 봤다.
김득구는 자기 말대로 "가문도 뼈대도 재산도 없었던" 강원도의 어촌마을 고성에서 아버지가 몇 번이나 바뀌는 바람에 성도 등 달아 몇 번씩 바뀌는 "개득구"의 삶을 살다가 14살에 가출한다. 무작정 상경 이후 갖은 고생을 필연적인 코스처럼 거치던 그가 그 시대에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스프링보드는 권투였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권투선수는 아니었다. 특기나 화려한 기술은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다. 동아체육관에서 김현치관장을 만나서 권투선수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은 김득구에게는 한 마디로 자신과의 싸움의 과정이었다. "권투선수는 미스코리아보다 더 거울을 많이 봐야돼. 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거울 안에 있는 상대가 바로 네가 싸워야 할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지. 딱 한 사람만 이기면 된다. 그게 바로 네 앞에 있는 사람이다."
어디 권투뿐이겠는가.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시작되고 자기와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싸움이 처절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여유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관장은 그런 훈시를 끝내고 나서 거울 앞에 선 김득구에게 농담처럼 툭 던진다.
"노래 한 곡 불러봐라" "예?" "앞으로는 네 앞에 있는 그 사람과 파인플레이를 해야 할텐데 서로 잘 해보자는 뜻으로 노래 한 곡 불러보란 말이다."
". . . 권투란 무엇일까.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 . ."
유오성은 좋은 배우다. ‘친구’에서도 좋았지만 김득구를 훨씬 더 잘했다. 백인이었기에 더욱 영웅이었던 멘시니와 싸우려고 라스베가스에 날아간 김득구가 그 곳에서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 그런 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 이런 모습을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그의 눈빛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곽경태감독은 김득구의 매니저였던 김현치와 김득구의 입들을 빌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토해낸다. 다소 교장선생님같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IMF를 졸업한지 불과 2년만에 다시 흥청거리는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지만 어둡지 않다. 힘든 삶을 그렸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권투가 할만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권투가 공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 팔 셋 달린 사람 봤어? 어차피 다 두 팔로 싸우는 것이니 남이 열 번 뻗을 때 난 스무 번 뻗으면 되는 거란 말이야."정직하게 살면 정직한 거둠이 있다고 믿는 한 그 사람이 불행할 이유는 없다. 아직도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는 믿음이 이런 정직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은 믿음에 속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경험과 사실을 초월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실제로 세상은 어쨌든 그리고 언제까지나 공평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 . !" 마지막 자막으로 떠오르는, 김득구의 일기장에 남겨졌던 메모는 모든 관객들의 마음에 새겨지면서 어느새 그것이 자신의 결심인양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기는 것이 챔피언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바로 인생 챔피언이야." 우리 모두가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소망과 격려를 담은 건강하고 기분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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