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뜰의 석류나무에는 빨간 석류가 익어가고 뒤뜰의 감나무에는 주홍빛 단감들이 짙어 가는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11월이 오면 함께 감밭, 사과밭에 나들이 가자고 하던 순이는 모든 희망과 고통을 모두 벗어버리고 자신의 생일을 몇 일 앞둔 지난 초여름에 영원한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11월 막바지, 이제 단 한 장 남은 마지막 달의 달력을 바라보면서 불치병으로 고생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뒤로 남겨놓고 떠나간 친구 순이를 그리워하며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순이와 나는 27년 전 같은 해에 새크라멘토로 이민 와서 초급 영어반에서 처음 만난 이후 한결 같이 친형제처럼 지내왔다. 영어반 수업이 끝나면 함께 쇼핑을 다니며 때로 점심을 사먹으며 서울에서 살던 얘기, 앞으로 닥칠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의논하면서 인생 항로를 함께 살아온 친구였다. 순이네와 우리 집은 약 3마일 정도 거리에 있었다.
내가 직장(은행)에 다닐 때 가끔 오버타임 근무로 늦게 귀가할 때면 순이는 우리 아이들을 데려다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따사로움이 깃들인 저녁식사를 만들어주곤 했다. 순이네 집에 들어서면 우리 아이들이 순이네 이이들과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말문이 막히곤 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순이는 여러 가지 모양의 맛있는 과자를 구어 이웃집들과 우리 집에 사랑을 전달하곤 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누군가 대화를 주고받을 친구가 그리울 때면 순이를 찾아가 따뜻한 보리차 한잔씩을 나누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를 의논하기도 했다. 아이들끼리도 서로 잘 어울려서 주말이면 함께 모여 축구나 농구를 즐겼고 공부에도 좋은 선의의 경쟁을 벌여 모두들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의사, 변호사, 설계사들이 되어 한국계 미국시민으로서 주류사회에 필요한 인물들로 성장했다.
이 모든 싱그러운 열매들은 순이의 고달픈 이민생활이 그들에게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인생은 순례자라고 한다. 순례는 무작정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진창, 마른땅, 들판과 가시덤불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진지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단감과 석류는 또 다시 무르익어 가고 있지만 한번 간 친구 순이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이를 필요로 하지만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 보다 더 많이 순이가 필요하셨기에 이렇게 일찍 불러 가셨나보다. 오늘도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순이의 영혼에 편안한 쉼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