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느껴보는 희망찬 기쁨이었다.
월요일 아침은 얼마 전부터 기다려왔던 아침이었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에서 도착한 두 꼬마들과 그들의 부모님을 모시고 학교로 등록하러 가는 날이었던 것이다.
저절로 미국에서 도착하던 날부터 첫 등교하던 때가 떠올랐다. 삼 십 여 년 전 내가 이곳에 도착한 날은 4월 초 화창한 봄날이었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주말을 넘기고 돌아온 월요일부터 학교엘 가기 시작했다. 어떠한 마음의 상태였는지 기억이 별로 없고, 첫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영어도 할 줄 모르고 들어간 고등학교였으니 엄청나게 두려웠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니 이년쯤 미리 오셔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마중 나오셨다. 아버지는 곧 딸 셋을 데리고 산호세를 향해 운전하셨다. 큰언니는 앞좌석에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것으로 기억되고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우뚝우뚝 솟은 빌딩이 왜 안보일까 생각했다. 안보여 실망하였고, 한참 뒤에 도착한 시골의 방 두 개 짜리 아파트엔 침대도 전등도 없어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일 센트, 오 센트, 십 센트, 이십 오 센트 짜리 동전을 예쁜 유리병에서 주르륵 바닥에 부으신 후 오 센트와 십 센트의 신기함에 대해 일려주셨다. 십 센트 동전이 오 센트의 것보다 크기가 작다는 사실은 그 당시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그리도 예뻐 보였던 투명한 유리병은 나중에서야 김치 병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도착한 곳이 산 조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산호세라는 것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월요일 날 학교에 도착해서도 어리둥절 하는 사이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또 있다. 한국에서와 달리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없이 보라는 듯이 고등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별로 오래 전 같지도 않는데 이제는 이민 선배가 되어 설래 이는 마음의 한 식구들을 동행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엘 다녀 온 것이다.
초등학교 등록은 너무 간단히 끝냈다. 등록이 된 아이를 데리고 4학년 교실을 향해 걸어가면서 남자아이는 하나도 안 무섭다며 누나와 어른들에게 안심을 주곤 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담임선생님이 요란스럽게 반겨주었다. 두 꼬마들과 부모님들은 무슨 일이 터졌는가 싶을 정도의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얼마나 놀라웠을까 싶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 되어 줄을 서서 운동장으로 나가는 학생들 맨 뒤에 담임선생님은 꼬마를 세웠다. 그러한 아들을 보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안쓰러움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꼬마의 어머니 모습도 놓칠 수 없었다.
꼬마를 학교운동장에 다른 아이들 속에 둔 체 일행은 중학교를 향해 떠났다.
중학교에서는 좀 달랐다. 입학서류를 하고 나니 카운슬러가 2,3시간 외출중이라면서 화요일부터 학교를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딸아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어떻게 하루를 더 참을 수 있어요" 한다.
돌아 나오는 우리 일행 속에서 딸아이는 "엄마 나 겁나"하며 엄마의 팔목을 잡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배움의 아이들이 만이 가지고 있는 총명함과 행복함이 잔잔하게 풍겨왔다.
훗날 그들은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어리둥절하던 그때를 기억할 수 없으면서도 할 수 있듯이 그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들은 이날이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희망찬 날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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