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어느덧 무르녹아 달 밝고 서리 찬 밤…,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나뭇잎이 길바닥에 뒹구는 것도, 잔디가 시들고 꺾여져 가는 모습도, 색색의 옷을 벗어 숲속의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가을의 또다른 풍경으로 못 견디게 좋고 그 위에 떠 있는 말간 하늘이며 흰 구름도 이 계절에만 있는 것 같아 소중스럽다.
이 계절에 삶을 윤택하게 하고 영혼을 살찌우며 미래를 창조케 하는 무수한 상상의 원동력인 ‘책’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을 제한 없이 자유로이 살아가고 있다. 이 같은 초현재적인 삶은 책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인간이 창안해 낸 수많은 도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도구이다. 다른 도구들은 모두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 신체의 부분적 확장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눈의 확장이며, 자동차나 비행기는 발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신체의 일부가 아닌, 기억과 상상의 확장이다. 기억과 상상의 확장인 책을 읽음으로써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초월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책이 인간의 기억과 상상의 도구로서 초월적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훌륭한 창안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도구는 읽혀져야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작용하지 않는 망각된 기억이며, 영혼이 죽은 상상일 뿐이다.
책의 진가인 기억과 상상을 발휘하는 것이 독서이다. 그리고 독서의 가치는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찾는 데 있으며 삶의 서정적 질을 높이는 데에 있다. 순수한 정서, 생활의 여유, 삶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맛보고, 철학을 생각하고, 삶과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경계할 필요도 없고, 서두를 필요도 없으며, 독서의 구체적인 결과를 얻지 못해도 조금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이야기가 이야기로 존재하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것은 이런 독서 때문이다. 이런 독서는 상상을 위한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억과 상상은 모두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사회가 급변하고, 지식이 범람하여, 정보의 소유가 경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요즈음과 같은 산업화, 전문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독서 가치 중 ‘정서와 즐거움을 위한 독서’보다는 ‘지식과 정보를 찾기 위한 독서’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 그리고 이 같은 실용적 독서 가치 추구 때문에 당장의 필요와는 거리가 먼, 그러나 오히려 더 인간적인 정서와 즐거움의 독서는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우리들은 교육과 학습을 위한 독서, 발전을 위한 독서 자료는 찾으면서도 인간을 이해하고, 즐거움을 맛보고, 정서를 순화하는 독서는 멀리한다. 지혜의 독서는 뒷전으로 밀리고, 당장의 이익이나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지식의 독서만이 중요하게 여겨져 독서가 생활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또 바쁜 일상을 핑계로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한국 비디오들은 가까이 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정신적, 정서적 욕구보다는 삶 자체를 의식이 없는, 대단히 건조하고 무의미 하게 방치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쉽고 재미있으며 편한 삶도 나쁘지 않지만 너무 가벼운 쪽으로만 인생이 치우치면 결국 우리의 삶은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와 이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독서와 사색을 통한 내면의 양식이 필요하다.
독서 가치의 전반적 평가 절하와 독서의 수단화가 비록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독서에 대하여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삶에서의 독서의 위치를 다시 옛 상태로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서에 대한 기본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독서는 인간성을 형성하는 삶의 자양(滋養)이다. 그리고 이 자양은 마치 인간의 신체적 성장과도 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며, 그 결과는 평생토록 지속된다. 그러므로 절박한 상황에서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찾던 지금까지의 독서에서 벗어나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삶을 회상해 보며 즐거움도 찾는 독서로 새 발길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왜 책을 읽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냥 책이 좋아서 읽는다"고 대답하며, 시간이 있을 때에 무심코 들르는 곳이 책방이며, 가장 크게 감사하는 선물이 책 선물이 되는 그런 풍토의 조성이, 다급한 사회를 여유있는 사회로 만들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첩경이요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말 할러데이 시즌에는 지인이나 감사하고픈 이에게 소중한 마음을 담아 한 권의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
<편집·취재부장 /ej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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