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표정은 어느 나라이건 비슷하다. 영·미문화권의 “워치 나이트”나, 우리 나라의 “복맞이 밤샘"이 그렇다.
우리의 12월은 ‘섣달’ 외에도 50여개의 별칭(別稱)이 있다. 독서의 계절이라 하여 ‘벼슬 달’, 마지막 달이라 하여 ‘그믐달’이라 했고, 춘대월(春待月), 매초월(梅初月) 같은 서정적인 별칭도 있다.
그리고 ‘섣달’ 한달 동안은 세모선(歲暮善)이라 하여 나라에서는 이태원 홍재원 등 원(院)에 사는 빈민촌을 돕고, 일반 민가나 촌가에서도 가난한 이웃과 과세를 함께 하였다. 글공부하는 서생에게는 총명지(聰明紙)라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의 덕목(德目)을 써 주는 관례도 있었다. 본받을만한 사례라 하겠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은 눈썹이 희어진다 하여 외양간이며 장독대며 온 집안에 등잔불을 밝히고 뜬눈으로 새해 “복맞이"를 하였다. 베풀고 바라는 것이니 미풍(美風)이 아닐 수 없다.
때를 맞추어 그믐날 자정(子正)이 되면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의 종이 서른 세 번 울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다. 삼라만상 모든 것을 하나의 ‘우리’로 인식하고, 더불어 같이 발돋움하자는 뜻으로 서른 세 번 치는 것이다. 왜 서른 세 번인가.
삼(三·參·3)은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상서로운 숫자로 서양 사람의 ‘7’, 일본 사람의 ‘8’, 아랍 사람들의 ‘4’와 대조적이다. 과거(科擧)에서 목민관을 33인 뽑고,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를 33인으로 하고, 흔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삼 세번’이란 말도 ‘3’을 창조적인 숫자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세모삼성(歲暮三省), 이것은 한해를 돌이켜보고 반성하자는 교훈으로 주로 조선조 중종때 이언적(李彦迪)선생의 문하생에게 계승되어 내려온 관례이다. 그 내용은 첫째, 연중 남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반성하는 일, 둘째, 남이 보기에 잘못한 것도 아울러 반성하는 일, 셋째, 내가 속해 있는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에게 이기심이 생겨 소홀히 한 일을 반성하는 일이다.
이런 세모삼성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세모가 다가오면 그해를 돌이켜보고 무언가 새롭게 다짐하는 세모심리가 발동하게된다.
이제 우리는 세모를 맞아 주변의 어수선한 것들을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접어둘 것은 접어두고, 끊긴 것은 이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사소한 일로 끊겼던 형제 자매간, 고부간, 시누 올케간, 동서간, 이웃간 그리고 단체간의 크고 작은 단절을 이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살아 온 한 해를 돌이켜 보고, 살아 갈 새해를 다짐하는 송년회도 그렇다. 마시고, 고함치고, 흔들어 데는 알맹이 없는 입체적인 메뉴는 이제 ‘가족 단위의 송년회’, ‘이웃 돌보기 송년회’로 바뀌는 추세에 있다.
돈 쓰고 시간 낭비하고 몸 망가뜨리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술 냄새 풍기며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봐야하는 아내와 가족들 입장에서도 그렇고, 더구나 집안에 노부모가 계실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지금 우리 주위에는 몸과 마음이 추운 이웃이 널려있다는 딱한 현실도 있다. 양주잔을 치켜들고 ‘위하여’를 외치기 전에 북녘에서 추위에 떠는 동포들도 부디 상기했으면 한다.
“섣달 그믐날 광교 다리 같다"는 속담이 있다. 빚진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신세진 사람은 신세를 갚기 위해 다리 위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뜻이다. 홀가분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다음은 그 광교 다리 밑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앞 못보는 남편을 둔 맹씨 부부의 대화이다.
아내 : 오늘이 무슨 날이지요?
남편 : 그건 왜 묻소?(그날이 자신의 생일날이라)
아내 : 다리 위가 하루 종일 바빠서요.
남편 : 세모가 되어, 빚진 사람은 빚을 갚고, 신세진 사람은 신세를 갚기 위해 저렇게 왕래가 바쁜 것이오.
아내 : 그럼 우린 다행이네요. 빚진 것도 없고, 신세진 것도 없으니….
남편 : 허허! 그게 다 누구의 덕택인데…, 임자가 내게 시집온 덕택이지, 아시겠오.
아내 : 따는 그렇군요…. 여기 미역국 끓였어요. 만수무강 하세요 ….
남편 : 고맙소!, 정말 고맙소!! …
다리 위로 왕래하는 ‘있는 자’나, 다리 밑에서 사는 ‘없는 자’나, 한 달에 쌀 서말이면 족하다. 잠자리, 그것도 다섯자 안팎이다. 마음 편하기, 그건 오히려 맹씨 부부의 몫인지도 모른다.
머지 않아 우리는 섣달 그믐을 맞이하게 된다. 서른 세 번의 ‘종소리’ 듣기도 좋고, 10에서 0으로, 0에서 열광의 축배로 이어지는 ‘카운트다운’ 도 좋다. 문제는 뭔가 달라지길 바라는 다짐 없이 2003년의 문턱을 넘으려는 생각이다.
/ikhchang@aol.com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