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사람들은 사시사철 눈산(Mt. Rainier)을 바라보며 살면서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그린(Green) 크리스마스’에 더 익숙한 듯 싶다. 성탄절 아침 전나무 가지에 소복하게 쌓인 흰눈보다는 그 가지를 스치며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에서 더 정감을 느낀다.
추녀 끝의 낙수소리도 영락없는 오케스트라 연주다. 길고 짧은 빗자락들의 고저장단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이들을 음악이라는 예술로 승화시켰다. 필자가 젊었을 때 크게 유행한‘오동동 타령’에도 낙숫물 얘기가 나온다. 비슷한 무렵‘떨어지는 빗줄기의 음악을 들으세요’라는 미국 팝송도 한국에서 유행했었다. 빗물 소리를 노래하는 마음은 동서간에 차이가 없는 듯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이건 그린 크리스마스이건 음악이 없는 성탄절은 상상할 수 없다. 12월 들어서기가 무섭게 상가마다‘징글벨’이나‘고요한 밤’같은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진다. 크리스마스가 지구촌 축제가 된 데는 이들 캐롤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교회에 다니기 전 어렸을 적에 이미‘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라며 우리말로 징글벨을 불렀다.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나라의 아이들도 징글벨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성가나 아리아보다도 더 감동적인 음악은 순수한 자연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꽃과 무지개, 반딧불과 별빛,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 햇살의 광채와 교교한 달빛 등 모든 자연현상이 음악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뿐인가? 타이프라이터 치는 소리, 고장난 벽시계의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 불꽃놀이의 폭죽 소리, 전쟁터의 대포 소리까지도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다. 음악의 세계에서는 호두까기인형이 춤추고 늑대가 소년과 이야기한다.
악성으로 떠받들어지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6번)이나 피아노 소나타‘월광’을 들어보면 음악이 자연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드뷔시의 ‘달빛’도 그렇고, 클래식 팬이면 누구나 따라 흥얼거리는 비발디의‘4계절’도 마찬가지다. 비에 대한 노래는 대중의 감성에 어필해야하는 유행가 쪽에 더 많은 듯 싶다.‘비 내리는 호남선’‘비의 나그네’‘밤 비’가 그렇고‘비와 눈물’‘빗속에서 노래하며’‘빗방울은 내 머리 위에 계속 떨어지고’‘비야 제발 가다오’등 외국 팝송들이 그렇다.
필자 생각에 빗 노래는 변주가 많아 좋다. 음색과 화성과 박자가 가지각색이다. 심포니가 소낙비 내린 뒤 초원 위에 뜬 무지개 같이 칠색 찬란하다면 처마 끝에서 한줄기로 또박또박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피아노 솔로 같다. 오페라의 정겨운 소프라노 아리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 같다면 차창을 요란하게 때리며 휘몰아치는 폭우는 랍소디(광시곡)와 같다. 캄캄한 밤 숲 속 텐트 위에 내리는 비는 레버리(환상곡) 같지 않을까?
모든 노래가 그렇듯 빗 노래도 듣는 사람에 따라 감흥이 달라질 수 있다. 비를 찬미하는 필자도 빗 노래를 듣다보면 마음이 무겁고 울적해질 때가 있다. 감수성 예민한 10대 소녀들은 비를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거나 환희를 느낄 수 있지만 홈리스(노숙자)들은 비를 환영할 리 없다. 자기의 잠자리가 될 시멘트 바닥을 적시기 때문이다.
흔히들 시애틀의 겨울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싫다고 한다. 우울증이나 신경통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겨울에 눈이 와야지 웬 비가 그렇게 끈임 없이 내리느냐고 짜증내는 사람도 있지만 비오듯 눈이 온다고 가상하면 더 끔찍스럽다.
어차피 시애틀에서 살려면 비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비를 싫어하기 보다 비를 사랑하고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나가서 비를 맞자. 그리고 그린 크리스마스를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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