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따뜻하고 진지한 대화 필요
K는 여느 아이와 다름없는 평범한 학생이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나게 공부를 잘한다거나 예능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보통 우리가 말하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다. 한국말이 더 편하고 한국 문화에 더 익숙한 부모 속 안 썩이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아이다.
K는 집안의 형편을 감안, 고등학교 졸업 후 2년제 대학에 진학하여 진로가 확정되면 4년제 대학에 편입하겠다고 아예 마음을 먹었기에 12학년 때는 대입 준비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일을 하면서 맘 편히 공부했다. 그래서였는지 12학년 때 수업을 빼먹고 집에 가다가 경찰에 걸려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와서 알게 되었다. 엄한 부모님이기에 이 사실을 알면 큰일 날 것이라며 한번만 봐 달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정했다. K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하고 난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얘기했었다. 얼마 뒤 K는 아빠 친구가 와서 일을 해결했다며 “그때 선생님이 알아서 하라며 나가버려서 너무 황당했어요”라고 얘기했다.
그 후로 K는 나의 사무실에 들러서 서류를 정리해 주기도 하고 잔심부름도 자청하며 나에게 잔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 선생님이니 자기의 맘을 족집게처럼 안다며 나를 진작에 만났더라면 더 열심히 공부했을 거라고 아쉬움을 표하며 1년 전 졸업했다. 졸업한 후에도 K는 공부가 잘 안 되는지 가끔 찾아와서 푸념을 늘어놓고 한숨만 푹푹 쉬다 갔다. 전공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여 공부하는 것이 이중으로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 K를 보면서 나의 대학시절 너무 힘이 들 때 전공 교수도 아닌 한인 교수를 찾아가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시는 그분께 하소연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핵물리학이 전공인 그 교수님은 나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앞으로 은퇴하면 자원봉사를 할거라며 당시 교도소에 자원봉사를 갔다가 한인 청소년을 만나 마음 아파하던 얘기도 해 주셨다. 그 교수님은 나이 어린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 주시며 자신의 인생관을 나와 진지하게 나누셨다. 나도 이때 처음으로 정리되지 않은 내 꿈을 대충 엮어서 빈 내 마음에 도장을 찍어놨다. 그리곤 한동안 그 꿈이 손에 닿을 것 같아 힘을 내서 그 학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학은 갔지만 전공을 정하지 못한 아이들, 전공은 정했지만 그것이 진짜 본인이 평생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아이들, 대학을 입학하면 모든 게 쉽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아이들은 원하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속으로 애를 태우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대학에 가면 잘 포장된 도로에서 자가용 타면서 쉽게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아이들은 첫 학기부터 쉽지 않음에 속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전공을 정하지 못한 것에 불안해하면 학점 관리 때문에 듣고 싶은 과목을 듣지 못하고 대학을 일단 마치고 보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럴 땐 오히려 전공을 정하지 않고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잘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하고 다듬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그들만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아직도 뭘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린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가족이나 생계 때문에 원치도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는가.
고교 졸업이나 대학 입학이 주는 짜릿함보다는 그들의 또 다른 불안한 시작 앞에서 미래에 대해 우리 어른들의 시행착오를 그들과 허물없이 나눌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내가 그 교수님을 그냥 이유 없이 방문했다가 나의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해서 그 방을 나온 것처럼.
K가 내 사무실을 나가면서 내게 어떤 명언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그녀가 내게 불안한 맘을 열어 보이고 나는 그녀에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으로 마주했다는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그녀가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경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