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기도는 고행 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교신자였으니 눈을 뜨면 암송기도로 시작, 잠들 때까지 기도였다. 매일 의자도 없는 마루바닥에서 새벽미사 복사노릇을 하다보니 발등엔 못이 박혔다. 나에게 기도는 국민의 4대 의무 같은 거였다.
어른이 된 뒤에야 산 속 피정센터에서 신부님과 신자 부부들이 빙 둘러 손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기도란 사랑하는 이들의 대화 같은 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미국에 와서 절실하게 기도했던 기억은 식품점을 할 때였다. 자정이 넘어 오는 전화는 대개가 가게에 알람이 울리니 가보라는 거다. 30분 동안 프리웨이를 달리다 보면 저절로 매달리게 된다. 이번 만 봐주세요. 그러나 창문 유리도 깨지지 않고 별일 없어 돌아 올 때면 당연히(?) 감사기도는 빼 먹는다.
국어 사전을 보면 기도란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신불(神佛)에게 비는 일이다. 그러나 떼를 쓰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게 기도라면 문제는 이런데 있다. 강 한가운데 한배를 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쪽으로 가자고 기도한다면 들어줄 신은 황당한 처지가 된다. 입시 때는 간절한 기도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이 사람 들어주면 저 사람의 아들이 낙방되니 신은 현명하게도 그들 일에 관여하지 않으리라 본다. "우리 아이가 그동안 준비 한 것을 제대로 챙기게만 부탁합니다." 정도면 몰라도.
"아이를 살려 만 주시면 제 다리를 끊으셔도 됩니다." 서슴없는 사랑 앞에서는 신의 마음도 움직여지리라. 절벽 끝 나무 뿌리에 매달린 자에게 "그 손을 놓아라." 그러실 때 움켜진 손을 놓는 마음이 아니면 기도의 홍수 시대에 신이 끄떡이나 하시겠는가.
요즈음 와서야 기도는 신뢰를 바탕으로 신과 주고받는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 공부 할 때 수녀님에게서 들은 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성당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아기 예수 상을 들고 나와 세 발 자전거에 태우고 마당을 빙빙 돌았다. 종치는 아저씨가 달려와 멈추게 했다. "안돼요 아저씨, 내가 이번 시험 백 점 맞으면 예수님 자전거 태워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뉴욕 롱아일랜드에 사는 마태(17)는 아버지 김성일(44)씨와 동생, 3父子 피아니스트다. 마태가 태어났을 때 오른 발이 접혀 걸을 수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부부는 신과 작은 약속을 했다. 13개월만에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아이의 오른 발로 피아노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 하나님 우리들의 음악을 세상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받치겠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모금 공연을 계속해 오고있다. 마태는 2년 전 9,11사태로 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릴 때 바로 옆 학교 건물에서 참사를 목격했다.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년은 이런 기도를 했다. "생명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았어요.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 내가 하는 일이 생명을 살리고 위로하는 편에 서게 해주세요."
하루하루 죽음의 낭떠러지로 달려가면서, 삶의 무력함에 허둥대다가 기도를 자기 구원을 위한 도구로만 알고 살아온 이에게 1학년 초등학생과 마태의 기도가 뒤통수를 친다.
한국 여류수필가의 글 한 대목이다. 아들 대학 합격과 야구감독인 남편의 우승을 위해 부처님 앞에서 쉬지 않고 백팔배, 절을 하면서도 오랜 시간 두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 하느라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때 문득 부처님은 골고루 단비를 주시는데 어리석은 중생은 행여 빠질세라 작은 그릇을 다투어 내밀면서 "여기 주세요. 여기 주세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남편도 아들도 머리에서 사라졌다. 마음이 그득해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젊어서는 세상을 뒤덮을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킬 힘을, 노년에 와서야 제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수피 고승 바지야드의 글이 생각난다.
일전에 누구를 찾느라 성당회관을 뛰어다니다가 무심코 드려다 본 기도실에서 뒤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수녀님을 보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행복한 표정, 그 아름다운 기도에 나도 감전 된 듯 시끄러운 세상이 별안간 평화롭게 보였다.
지난달 LA에 사는 56세의 닥터 석이 샌프란시스코 마라톤을 완주하고 떠나면서 내게 전화했다. "22마일 지점에서 이선생님 가정과 결혼한 아드님 부부를 위해 기도했어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을 담보로 남을 위한 기도는 효력이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생활화 된 기도>는 내게 세상 살아가는 참된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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