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12일 부통령이었던 ‘투르먼’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3시간도 못돼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선서한지 30분도 못 돼 「맨해턴 프로젝트」에 관한 비밀 토론에 들어갔다.
토론에서 한 정보 관계자는 오키나와에 일본주둔군 12만명 중 10만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2만명이 저항하다가 수류탄으로 자폭했지만 아직도 5천대의 전투기와 200만의 정예 군대가 있고, 규슈(九州) 점령에 미군 25만, 일본 본토 상육에 50만명의 미군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해 5월 8일 독일이 항복했지만 투르먼 대통령은「전쟁은 이제부터」라고 비상선언을 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뒤 미국은 속전 속결의 전략을 세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사흘 뒤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호전적인 일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기세를 높이자 미국은 다음 투하 목표지를 도쿄(東京)로 정했다. 그러나 8월 10일에 열린 전략회의에서 오키나와 공군 사령관인 ‘드뤼틀’은「천왕까지 죽으면 협상 상대가 없어진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러한 다급한 상황하에 8월 14일 도쿄 궁성(宮城) 인근의 한 방공호(防空壕)에서는 긴급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항복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군부(軍府)에서 주장하는 ‘최후의 1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죽자’는 옥쇄론(玉碎論)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최대의 불충이며 반역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동향무덕)’가 입을 열었다. "포스담 선언(무조건 항복)을 수락하지 않으면 폐하(陛下)의 신민(臣民) 모두가 죽고 맙니다…" 이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이 히로히토 천황은 즉시 항복문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10분전,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부대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의 소속부대인 보병 제223부대 전 장병이 지시에 따라 완전 무장 차림으로 연병장에 집합 완료하였다. 부대장도 각 지휘관도 일체 말이 없다. 천황의 특별 교시를 기다리고 있는 숨 가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오가 되자 히로히토 천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짐(朕)이 미, 영, 중, 소 연합국의 공동선언을 부득이 수락함에 있어…」라는 말에 이어「전·후방 장병은 짐의 뜻을 깊이 살펴 은인 자중하라」는 말로 특별 방송이 끝났다.
그야말로 일본 사람 특히 일본 군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날 벼락이다. 5, 6명으로 헤아리는 팔팔한 젊은 장교들이 땅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그들 특유의 할복 자살이 감행되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다. 연병장은 온통 통곡의 장이 되었다.
우리는 막사에 돌아와 대기 상태로 들어갔고, 일본계 신병들은 계속 마루 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몇 대의 장갑차가 영문 밖을 향해 포진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서울 거주 신병을 따로 집합시켰다. ‘일본인이 무사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는 부대장의 훈시가 있은 다음 우리는 귀가 조치의 첫 대상이 되었다.
영문 밖으로 나와 우리들은 태극기 물결 속에 서로 부등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다시 학창으로 돌아갔다. 50여명을 헤아렸던 문과 동급생 중 복교한 사람은 13명뿐이었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 그러나 가정을 반추(反芻)해 보는 가정역사(Alternative history)는 불행했던 기정(旣定)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약이 될 수도 있다.
첫째, 만약 8월 10일의 미군전략회의에서 도쿄 원폭 투하에 반대하는 의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도인 도쿄 인근의 200만명 내외가 죽었을 것이고 일본의 재기(再起)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이어 제4, 제5의 원폭 투하 후보지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950년 한국전란을 미끼로 일본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보지도 못 했을 것이다.
둘째, 만약 8월 14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도고 시게노리’의 항복 권고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군부의 주장대로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일본 국민 대부분이 죽창을 들고 싸우다가 죽었을 것이고, 미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만약 미국이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8선은 물론, 6·25 전란도 없었을 것이고 하나의 정부가 한반도를 이끌고 나갔을 것이다.
이만 때가 되면 역사는 기정(旣定) 속에 가정(假定)이라는 꼬리를 물고 돌고 있지만 왜 미국이 다 이겨 놓은 전쟁판에 소련을 끌어들여 38선을 만들어 놓았는지 참담한 일이다.
그리고 한국계 ‘도고 시게노리’가 어떤 심정으로 무조건 항복을 천황에게 청원했는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정유재란(1597)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陶工)의 후예이다.
통일절(統一節)로 이어져야 할 이 광복절 행사가 올해로 "쉰 여덟번 째"다. 어려서 헤어진 이산 가족도 이젠 환갑을 넘어 8순 노인들이 되었다.
경의선 철도 연결이 문제가 아니다. 이에 앞서 6만명에 달하는 남(南)의 우리가 독립문에서 판문점까지 150리(38마일)를 인간 띠로 연결한 것 처럼, 북(北)은 이제 평양 만경대에서 판문점까지 인간 띠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판문점 공동관리소에서 남북이 “뜨거운 가슴과 찬 머리"로 손을 맞잡는 인맥(人脈)의 연결이 우선되어야 한다.
/ikhchang@aol.com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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