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의 아픔 삭이는 작업”
▶ 주미한국대사관저 . 주 러시아 美대사관도 조경
"제가 자란 곳은 혜화동입니다. 혜화초등학교를 다녔지요. 주변에 있던 건물들, 시장, 학교,,, 모든게 아직 생생합니다."
인터뷰 도중 어릴 적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제프리 리(47)씨의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건축가답게 리씨는 "문자를 외우는 것 보다는 사물이나 정황을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게 훨씬 쉽다"고 말한다.
최근 펜타곤에 조성되는 1,100만달러짜리 9.11 추모공원 프로젝트를 따내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된 리씨에게 이 공사가 경력상 최대 공사는 아니다. 이 전에도 두 번이나 훨씬 큰 규모의 펜타곤 공사를 한 적이 있고 주러시아 미국대사관 설계 프로젝트도 따낸 그는 워싱턴 지역에서 이미 명성이 높다. DC 차이나타운 북쪽 7가와 I가 사이에 위치한 아담하지만 아티스틱한 설계 사무실에서 그의 작품 쏟아져 나온다. 16명의 직원들은 독일계, 아프리칸 아메리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한인 직원은 서울시립대학 교수로 발령받은 선 방씨가 유일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계약 액수의 크고 적음을 떠나 개인적으로 제게 몹시 중요합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9.11 테러사건의 치유 작업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희생자 가운데는 한인 미 여군 박진선 기술하사관이 포함돼 그렇습니다."
리씨와 센텍스사가 합작한 ‘센텍스 리’사가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절대 행운이 아니었다.
우선 지난 5년 동안 다수의 연방 정부 컨트랙트를 수주, 실력을 인정받았고 이번 입찰에서도 3차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프로젝트 입찰자의 이름은 철저하게 비밀로 가려진 채 제출된 계획안과 고객들의 평가로 채점됐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추천도 있었다.
리씨는 혜화초등학교 5학년 때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버지니아 남쪽 헬리팩스 카운티로 이민왔다.
"제 어린시절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차별도 없었구요. 백인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우리 가족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1978년 버지니아대학(UVA)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영어만 쓰다보니 한국말을 하려면 혀가 돌지 않았다.안되겠다 싶어 한국 근무를 자원하기로 했다.
"현대 중공업 입사 면접에서 면접관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구요. 미국의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국말도 부족한 친구가 입사하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결국 취직이 됐고 당시 유능한 사원들이 배치되는 ‘해외설계부’로 발령났습니다."
일년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니 리씨의 실력을 인정한 회사측에서 중동지역에 건설되는 4억 5,000만달러 ‘도하 쉐라튼 호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회사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 파격적인 보수를 요구했고 6개월을 더 일한 후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다.
이후 보스턴 ‘아키텍쳐 콜레버러티브’ 등의 회사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한국 영종도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미국회사의 대표로 활약하는 등 굵직한 사업 경력을 쌓았다.
‘리 앤 어소시어츠’는 17년전에 세웠다.
"며칠 전 롯데에 갔더니 태극기를 나눠주더군요. 한 장 얻어다 집에 걸었더니 아이들이 매우 좋아했어요. 그런데 태극기 문양 설명서를 보니까 제 작품 구상의 원칙과 매우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연과 우주와의 조화, 그리고 균형, 이것이 제 작업의 근저를 이루고 있습니다." 리씨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는 나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인간의 능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말을 한인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알링턴에 거주하는 리씨는 6살, 4살의 두 아들이 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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