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이 훨훨 타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산 능선을 따라 불길이 넘실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산불의 첫 피해지, 란초 쿠카몽가에 사는 옛 동료가 전했다. 지난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LA인근 5개 카운티에서 73만 에이커를 불태우며 가옥 2,600여채와 20명의 생명을 앗아간 남가주 산불은 처음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란초 쿠카몽가 쪽에는 한인들도 많이 사는 데, 별 피해가 없어야 할텐데…”하고 걱정은 했지만, 그 지역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그 동료가 유일하고 그의 집이 산불 현장에서 떨어져 있다는 소식을 듣자 산불은 그저 ‘뉴스’일 뿐이었다.
산불이 내게 현실로 다가온 것은 이틀 후였다. 그 주말 나는 멕시코로 1박2일의 여행을 다녀오느라 전혀 뉴스를 접하지 못했었다. 국경을 넘어 샌디에고 카운티로 들어서자 메케한 냄새와 흩날리는 하얀 재가 심해지는 것이 역력했다. “샌버나디노 산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았나?”의아해 하며 어느 식당 앞에 차를 대는데 갑자기 경찰 서너 명이 다가왔다. “산불 때문에 위험하니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쫓기듯 LA로 올라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새크라멘토에 갔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후 아이를 데리러 공항에 가려던 참이었다. 딸은 “산불 때문에 LA행 항공편이 모두 취소되었다. 항공사 직원들도 언제 비행기가 다시 갈지 모른다고 한다”며 울먹거렸다.
그제 서야 TV를 켜니 이틀 전 란초 쿠카몽가에서만 타던 산불은 그 사이 샌버나디노 산으로 번지고, 우리가족이 거의 10년을 살았던 클레어몬트에서 주택 수십채에 피해를 입혔으며, 지금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시미밸리를 태우고 있었다. 샌디에고 카운티에서는 이번 불로 한 동네 전체가 불타 없어져 버리기도 했다.
그후 한 주, 우리의 눈과 귀는 연일 시뻘건 불과 자고 나면 늘어나는 시커먼 폐허, 집을 잃은 혹은 가족까지 잃은 피해자들의 비통한 모습들로 채워졌다.
“대피소에서 밤을 새우면서 내내 집이 불안했는데 이젠 불안해 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다 타버렸으니까요”“동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우리 집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고 시커먼 연기만 올라오더군요”“우리 가족 다 살아 있으니 됐지요.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고 다시 집을 지을 겁니다”… 뉴스에 보도된 피해자들이 울음 삼키며 한 말들이다.
재해나 사고는 우리가 공들여 쌓아온 인생의 탑을 한순간에 뚝 꺾어 버리는 충격이다. 그것은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이지만 타성에 젖어 쌓던 탑의 내용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깨닫는 기회이다. 한바탕 대피 소동을 겪고 난 시미 밸리의 한 주부가 말했다.
“막상 짐을 챙기려고 보니 꼭 챙겨야겠다 싶은 건 별로 없더군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너무 많이 사들이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이 휩쓸고 지나가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들에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으며 살아온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높은 탑의 대표적 상징은 바벨탑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의 상징으로 대개 풀이되지만, 가치의 전도를 지적하는 해석도 있다.
구약 시대 당시 인간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높은 건조물을 세웠는데, 점점 높이 쌓다 보니 탑의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벽돌을 쌓다가 떨어져서 죽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탑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벽돌이 하나 떨어지면 모두가 슬퍼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벽돌 하나를 쌓기 위해서는 다시 1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쌓고 있는 탑의 내용은 무엇일까. 산불로 타버릴 것보다는 태워버릴 수 없는 것에 비중을 두었으면 한다. ‘소유’대신 ‘존재’를 매만지는 것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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