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남편으로 볼티모어에 유학온 아내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다 유명을 달리한 박여선의 묘소가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채영창 워싱턴한인사편찬위원장과 볼티모어지역 한인사 편찬 관련 인사 등 7명은 13일 오후 볼티모어 서부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서 박여선의 묘소를 찾아냈다.
그의 묘비(사진)에는 영문으로 ‘Yousan Chairu Pak’ 성명과 함께 1868년 9월 21일 한국서 출생해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으며, ‘내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나를 맞아 들였고(마태 25.35)’라는 성경구절도 함께 쓰여 있었다.
박여선의 무덤은 재미사학자인 방선주 박사가 처음으로 발굴해 영문으로 소개된 바 있으나 한인사회에서 찾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여선은 볼티모어에 묻힌 최초의 한인이며, 그는 미주에 한인 이민이 시작되기 전 사망했기에 그의 묘소 또한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중 하나로 추정된다.
박여선은 1893년 신분의 차이를 넘어 박에스더와 결혼, 이듬해 아내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티모어의 여자 의과 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한 아내를 위해 자신은 뉴욕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4년간을 낯선 이국땅에서 상투머리 그대로 고생하며 아내를 뒷바라지 하던 박여선은 아내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기직전에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 하고 만다. 아내가 의대를 졸업하기 불과 16일전이었다. 박에스더의 유학을 주선한 셔우드 홀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에서 유산으로 불린 박여선은 미국에 온후 자신의 영어가 학업을 수행할 만큼 능숙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자 곧 아내의 뒷바라지로 돌아섰으며, 아내외에 유족으로 한국에 2명의 자매와 1명의 형제가 있었다.
<박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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