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흥남 부두 피난민 철수 작전에 큰공을 세워 ‘한국의 모세’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현봉학(82 토마스 제퍼슨 의대 명예 교수)박사가 당시 피난민 중의 한 명과 54년만에 해후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현 박사는 당시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한 뒤 이야기를 오는 17일(목)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 한국대사) 초청 강연회에서 털어놓을 예정이다. 서재필 기념 재단에서는 이 같은 현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해 서재필 대상 수상자로 현봉학 박사를 선정했다.
노스 필라에 있는 서재필 기념 재단(회장 정홍택)은 지난 14일 서재필 병원 회의실에서 현봉학 박사와 피난민 중의 한 명이었던 정장준(67 몽고메리 카운티 도일레스 타운 거주)씨의 극적인 해후를 주선했다. 현 박사는 정 씨에게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고 정 씨는 당시 피난할 수 있었던 덕분에 이렇게 미국에서 정착해 잘 살고 있다고 화답했다.
정 씨는 현 박사가 흥남 부두 피난민 철수 작전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2년까지 몰랐다. 정 씨는 우연히 현봉학 박사가 ‘한국의 모세’라고 불리게 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현 박사가 근무 중이던 필라 다운타운의 제퍼슨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현 박사는 당시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같은 고향 분이니 나중에 한 번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서재필 기념 재단 이사회에서 올해 서재필 대상 수상자로 현 박사를 선정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서재필 재단은 오는 9월 18일 아담스 마크 호텔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정장준 씨는 함흥 출신으로 1950년 12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오자 흥남으로 홀로 피신했다. 당시 흥남에는 미 10군단 사령부가 설치돼 있었으며 현봉학 박사가 사령관 민사 고문관으로서 통역과 피난민 구조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정 씨는 피난민 철수가 마무리된 1950년 12월 24일 오후 4시께 까지 부모 등 가족을 기다리다 마지막 배를 타고 탈출해 거제도에 수용됐다가 1973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당시 13살이었던 정 씨는 피난민을 실은 LST 수송선에서 바라 본 흥남 부두 폭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