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회 수 상
▶ 이순각 목사(워싱턴시온장로교회)
인격이란 말이나 행동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품격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품위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법률적인 책임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윤리와 도덕과 책임성이 있습니다. 인격 안에는 여러 가지 덕목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랑, 인내, 절제, 관용, 지혜, 지식, 용기, 정의, 의분, 겸손, 긍휼, 교만 등...
이러한 여러 가지 덕목 가운데 기준이 될 만한 덕목 한가지를 찾으라면 단연 인내입니다. 기독교회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내세우는 사랑도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음이 없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덕목들이 ‘참음’이 받쳐줄 때 비로소 제 값을 할 수 있습니다.
참음에는 이런 참음이 있습니다. 오래 참는 참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 때까지 부모는 참고 기다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참고 기다림에 실패해서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졌던 뜻을 끝까지 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신다”(벧후 3:8)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얼마만큼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는 고통의 질을 의미합니다. 고통의 질은 또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인격적이요 정신적인 것입니다. 얼마만큼 어려운 것을 참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관계됩니다. 이 두가지는 따로 오는 경우도 있으나 동시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내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사랑에도 대상이 있고 봉사에도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음에는 대상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대상입니다. 사랑하는데도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합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만 봉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내에는 밑천이 들지 않습니다. 못하는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핑계의 대상이 아니라 인내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스스로의 인격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내에는 자주성과 자원성이 있어야 합니다. 버티는 것은 참된 인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꾹꾹 누르며 ‘두고 보자 언젠가는 두 배로 되돌려 주리라’며 버티는 것은 바른 인내가 아닙니다.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인일 것이다”라고 교부 ‘크리쏘스토모스’는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열 두 영 더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이들을 없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가야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이해하면서 참아야 참 인내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권세나 재물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바로 그가 가진 인내력일 것입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된 그릇이 크냐 작으냐도 인내로 평가됩니다.
못 참는 사람은 집니다. 끝가지 인내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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