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의 날’을 맞은 13일 LA에서는 아침부터 기념행사가 줄을 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3번째, 전국 차원에서는 처음 맞는 코리안 아메리칸의 날이다.
지난 연말 연방의회가 ‘미주 한인의 날 결의안’을 가결했을 때 한인사회의 반응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주류사회가 드디어 우리를 중요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했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는 측이 있는 가 하면 “중국인의 날, 일본인의 날은 없는데, 우리가 너무 유난스러운 것 아닌가”라며 ‘튀는’ 행동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코리안 아메리칸의 날이 자연스럽게 거론될 만큼 미국사회에서 우리의 존재가 분명해졌다는 사실은 확실히 큰 변화이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고된 노동이나 영어의 장벽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도무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철저히 외면 당한 채 투쟁하듯 자긍심을 지켜나가야 했던 것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미국에서 코리안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었는지 LA의 민병수 변호사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부친인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를 따라 미국에 온 것은 1948년, 15살 때였다.
“한국에서는 인간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내가 인간이 아니더군요”
우선 코리아라는 나라가 미국인들의 인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나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아울러 당시 사회는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 합법적이고도 공공연하던 분위기. ‘아시안의 열등함’이 연방의회에서 논의될 정도였다. 학교에서 사람 취급 못 당하고, 왕따 당했다고 해서 하소연 할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10대는 친구가 가장 중요한 나이인데 친구 사귀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예쁜 백인 소녀들을 보면 가슴이 설렐 나이이지만 그 아이들은 내가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더군요. 언어 장벽, 문화 충격으로 매사에 ‘벙어리 냉가슴’이었습니다”
USC 한국학 연구소의 함재봉 소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는 1966년 초등학교 때 미국에 와서 2년 동안 미국 학교에 다녔고, 1974년 다시 부친 함병춘 주미대사를 따라 워싱턴 D.C.에 와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놀림과 너무도 차가웠던 학교선생들의 태도.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다가 2년 후 한국으로 돌아가니 어린 마음에 ‘정말 좋더라’고 그는 말했다.
“70년대 중반에 다시 오니 코리아라는 나라를 (미국인들이)조금 알기는 하더군요. 하지만 태권도 하는 나라라는 정도였어요. 당시 인기 있던 이소룡 덕분이었 지요”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민감한 나이, 민족적 자부심을 갖기 힘든 냉랭한 현실은 이중의 압박감이었다. ‘한국사람으로서 내세울게 뭐가 있나’를 당시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학교 친구들을 붙들고 수없이 반복했던 것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는 첨성대”“고려자기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기”등. 전통과 역사에 기댄 자부심 찾기였다.
‘미주 한인의 날’이 선포된 2000년대, 한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첨성대’나 ‘고려자기’를 외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외치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를 알기 때문이다. 셀폰, TV, 컴퓨터, 자동차 등 우수한 한국 상품들, 음악·영화를 통한 한류, 200만을 넘나드는 미주한인의 수적 파워로 ‘코리아’‘코리안’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미주 한인사회를 사람으로 보면 10대쯤 될까. 눈에도 띄지 않던 어린아이가 자라서 남들이 알아볼 수준이 되었다. 이제 책임감 있고 믿음직한 이 사회의 어른으로 성장할 여정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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