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함께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나와는 20년 넘게 가까이 일했지만 나는 그녀의 나이를 몰랐고 우리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은퇴가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참으로 사랑했고 계속 일하고 싶어했다.
문제는 그녀가 컴퓨터 사용에 자신을 잃은 것이었다. 매달 도입되는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와 새 서치엔진 활용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테크놀러지가 그녀를 전문직에서 도태시킨 것이었다. 그녀를 위한 송별만찬에서 나는 그녀가 나의 어머니보다도 한 살 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양한 나이 권이 함께 일하는 우리 기관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나이에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일 케이크에도 행운을 상징하는 촛불 한 개만을 켜놓는 것이 우리들의 관례이다.
한데 내가 일단 한국문화권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몇년생이신가요?”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친해질 가능성도 없는 관계에서도 이런 질문을 예사롭게 한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에 대한 관심 이전에 나이 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 높은 사람을 존경해 본 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인식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형님이라 불림 받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자기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에게는 슬슬 낮춤말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장자를 대우하는 것은 그 나이 동안에 그 만큼 많은 일을 했고 그 만큼 어려운 시점을 잘살아 주었고 아직도 본 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선택의 여지없이 우연히 엎어 받은 출생연도 때문은 아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나이는 먹게 된다. 잠자는 시간에도 세월은 흐르고 나이테는 늘어난다. 저절로 얻은 나이가 무슨 훈장이 되겠는가. 내 나이가 얼마인데,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나이를 방패 막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와 문화권에서는 정말 위력 없는 으름장일 뿐이다.
내가 가르치는 인터넷 클래스에는 80대의 고령자들이 몇 명 있다. 93세의 전직 건축가도 있었다. 손가락 관절통으로 마우스 사용이 불편한 그들을 위하여 손바닥으로 굴리는 마우스를 준비해 두고 있다. 그들이 새삼 생활전선에서 경제활동을 하려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 하겠는가. 기술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손자나 증손자들과 온라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서 나이 세기 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불편한 몸으로도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의 기억력은 날카롭지 못하고 손놀림은 느리지만 배우려는 의지만은 대단하다. 같은 교재를 몇 번씩 되풀이 가르치면서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연륜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앞에서 소개한 나의 친구도 이제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다. 90을 앞둔 그 친구는 빨간 구두를 신고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재주를 갖춘 사람인 것 같다.
인간의 나이는 단순한 연대기록이기 이전에 의식세계의 반영이어야 할 것이다. 자기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의지와 노력,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사랑, 열정 같은 것들이 우리를 젊게도, 늙게도 지탱해 주는 요소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이 세기는 정말로 부질없고, 잊어야 좋을 산수 셈이 아니겠는가?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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