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기억에 편입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한다. 사진을 찍어 두기도 하고, 사인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창’ ‘초록물고기’ 등에 출연한 연극배우 출신 영화배우 오지혜(38)의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그는 천자문(千字文)을 갖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날 때 이들에게 천자문에 쓰인 한자를 한 글자씩 받는 방법으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기억 속에 묶는다.
방식은 이렇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는 천자문에 쓰인 1,000자의 한자 중 한 글자를 순서대로 써 달라고 주문한다. 이런 부탁을 받은 사람은 주어진 한자를 종이에 적고 자신의 이름을 덧붙인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글자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글자를 고를 수 없다. 그냥 자신에게 돌아온 순서의 한자를 적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1,000자를 모두 채우게 되면 모두 오지혜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 1,000명의 자필 사인을 천자문의 한자와 함께 받게 되는 것이다.
오지혜는 이는 글자를 구걸해 책을 만든다고 해서 이른바 ‘걸자집(乞字集)’이라고 불리우는 서울 지역 풍습이라고 설명하며 나보다 아버지가 먼저 이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 오지혜의 아버지는 원로배우 오현경 씨로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걸자집’을 만들어왔다.
오지혜는 나 역시 배우이고 방송을 하다 보니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며 살면서 나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글자를 받고 싶다며 자신의 ‘글자 구걸’에 대해 설명했다.
윤도현 문소리 조정래 마광수 권영길 등 사회 주요 인사와 지인들에게 한자 받아
오지혜는 지금까지 약 1여 년간 280여 명의 지인들에게 글자를 받았다. 그 가운데에는 윤도현 문소리 등 연예인도 있고 조정래 마광수 등 문인들도 있다. 오지혜가 민주노동당 당원인 만큼 권영길 노회찬 등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상당수 된다.
그렇다고 모두 유명한 사람들만 걸자집을 채우는 것은 아니다. 오지혜는 가족, 친척들에게도 글자를 받았고, 동네 단골 카페 사장이나 고교 동창들의 이름도 있다고 설명한다.
원하는 글자를 고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본인 순서에 닥치는 한자를 적다 보니 글자와 사람의 성향이 우연치 않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에게 글자를 받을 때는 마침 그에게 주어진 글자가 ‘싸울 투(鬪)’자 였다고. 박 대변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한자를 보고 내가 평생 싸우면서 사는 사람이 맞나 보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또 배우 문소리에게는 ‘이름 명(名)’자, 마광수 교수에게는 ‘글월 문(文)’자가 주어져 필연같은 우연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 ‘클 거(巨)’자를 쓸 차례에는 사회비평가인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만나게 돼 그에게 이 글자를 받았다.
’死’ 등 부정적인 한자는 오지혜 부부가 직접 쓸 계획
그러나 모든 글자에 이렇듯 좋은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지혜는 아직 ‘죽을 사(死)’자의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며 ‘나쁜 기운을 모두 죽인다’ 등 글자의 해석이야 하기 나름이지만 그 차례가 돌아온 사람이 ‘죽을 사’자와 같은 부정적 뜻의 글자를 쓰기 싫다고 하면 그 글자들은 우리 부부가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지혜의 남편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를 연출한 이영은 감독이다.
오지혜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집안의 가보를 만들기 남기기 위해 걸자집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아버지가 만든 걸자집 역시 집안의 가보로 남아 있다고.
오지혜는 또 이 일을 계기로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덕담을 주고 받을 기회도 생긴다며 걸자집의 장점에 대해 부연했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오지혜 부부의 인생에 한 획을 긋는 ‘한 명’이 돼 그의 ‘이동식 방명록’ 1,000장을 채우게 될 지 궁금함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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