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UC버클리 한인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8일 ‘고려시대 문화와 예술’세미나에서 김성림(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움 학예연구사)씨가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서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고려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알면 조상이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주제를 택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불교를 통치이념 국제 무역이 활발했던 남녀평등 사회 개경이 수도, 사료가 적어 제대로 조명안 돼 고려청자와 불화는 화려 섬세함의 극치
우리들은 전통이라고 하면 흔히 조선시대를 떠올릴 정도로 조선시대는 우리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친숙한 느낌을 줍니다. 반면 고려시대는 왠지 멀고 먼 고대의 느낌을 줍니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가 한양 즉 서울이었던 조선과는 달리 개경 즉 현재의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지리적인 이유로 고려의 유물들 또한 우리에게는 낯설게 됩니다. 또한 고려는 조선의 조선왕조실록 같은 1차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그만큼 연구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고려 때 편찬된 고려실록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으나 이 두 사료는 고려가 패망한 후 조선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려말의 부패상과 혼란상을 의도적으로 부풀렸고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조선역사가들의 의견이 들어 있어 고려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평가를 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고려에 대한 연구를 할때는 고려시대의 문인들이 남긴 문집에 많이 의존을 하며 또한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중국인들의 글도 참고를 합니다. 그 중 1123년(인종 1년) 6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해 7월 돌아간 송나라 사신 서긍의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 (고려도경으로 약칭)이 비교적 자세한 고려인의 생활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고려는 유교를 중심으로 했던 조선과는 달리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폐쇄정책을 세우며 중국만을 상대하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의 벽란도에서는 중국의 송나라 상인은 물론 서역의 아라비아 상인과 일본, 동남아 상인들이 드나들며 국제무역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코리아(Korea)라고 불립니다. 이같은 우리 민족의 이름인 코리아는 바로 고려에서 유리한 이름입니다.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인 뤼브뤼키가 중국 동쪽에 “카울레 (Caule, 고려의 중국음을 옮긴 것)”라는 나라가 있다고 쓴 것이 서양 최초의 기록입니다. 우리 나라를 일컫는 말은 독일 ‘코레아’ 프랑스 ‘코레’ 스패니시 ‘코레아’ 러시안 ‘까레야’ 이슬람권에서 ‘코리’등 모두 고려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고려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고려인들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죄악시 여기지 않았으며 일부 고급관리들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생활을 향유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던 당대의 명문가 이자겸의 집을 예를 들면 집에는 방이 수백칸이였으며 벽에는 금분으로 그림을 그리고 흙벽과 나무에는 비단벽지를 발랐다고 하니 그 화려함이 상상이 갑니다. 조선시대의 유교를 숭상하던 양반들과는 달리 고려의 많은 조정관리들은 시장에서 가까이 살며 직접 상업에도 종사하여 재산을 불리고자 하였습니다. 고려후기 재상 이제현은 고려 조정 중신들이 쌀값, 소금값 등 시장돌아가는 이야기로 날을 새운다며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또한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고 혼인식은 보통 여자의 집에서 치러졌고 그 이후 한동안 신부 집에서 함께 살며 자식들 상당수는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모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고려 사회에서는 우선 재산이 아들딸 구분없이 균등하게 상속되었고 그러므로 의무도 균등하게 주어졌습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 부모를 모시는 뿐 아니라 죽고난 후에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모셨습니다.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부부관계에서는 이혼도 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견문록 고려도경에 고려의 이런 풍습에 대해 “고려인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며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예술품에는 무척 자랑스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영국의 미술사가인 하니(W.B. Honey)는 고려청자에 대해 “일찍이 인류가 만들어낸 도자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또한 고려불화는 중세 종교미술시대에서 동양채색화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0여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것도 고려인입니다. 고려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고 <25시>의 작가 게오르규(C.V. Gheorghiu)는 이것을 가장 숭고한 인간정신의 발현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 외에도 고려의 섬세한 은입사 금속공예품, 나전칠기용품등 고려의 유물들은 모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랑스러운 예술품들입니다.
참고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우리나라의 세계 문화유산은 7곳입니다. 1. 석굴암과 불국사 2. 종묘 3. 해인사 장경판전 (8만 대장경) 4. 창덕궁 5. 수원 화성 6. 경주 역사유적지구 7.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
<팔만대장경> 10-12세기에는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의 송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등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에서 두번 만들어졌는데 거란의 침입을 겪은 뒤 만든 첫번째 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대장경은 1251년 6천5백 여권의 분량으로 완성된 이 두번째 대장경이 8만 1,258매의 경판 5,230만자로 이루어진 두번째 대장경입니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은 근대 이전의 대장경으로는 유일하게 경판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내용도 가장 정확합니다.
<세계 최초의 발명품-금속활자> 세계 최초의 활자도 목판 인쇄를 발전시킨 동양에서 먼저 발명되었습니다. 목판인쇄는 기술자에게 너무 많은 경비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11세기 중국에서는 돈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좀더 경제적인 방법, 즉 활자에 의한 활판 인쇄를 고안하게 됐습니다. 낱글자 여러개를 미리 만들어 두고 원고대로 이것을 배열해서 판을 짠 다음 인쇄하는 방법, 활자는 한번 준비해 두면 재배열하여 여러 종류의 책을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든 활자는 도자기 활자였으나 깨지기 쉽고 조판하기 쉽지 않았으므로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후로 고려에서 구리, 주석, 납, 아연등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책인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입니다.
<고려불화> 중세시대는 종교의 시대이며 동서양에서 종교화가 주로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동양의 불교문화권 나라들도 불화를 제작하였는데 고려불화는 세계 불교회화의 최고봉입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들에게 고려불화는 친숙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양이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불화 중 대부분의 고려불화가 일본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불화중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입니다. 그 중 관음보살은 자비의 보살로 누구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안락한 세계로 인도해준다는 보살이어서 아미타불과 함께 가장 인기가 있어 조각과 그림으로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남아있는 관음보살도는 수월관음도인데 이는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보타락가산에 선재동자가 찾아와 관음보살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현재 일본 경신사 소장인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 가운데 크기(419x254 cm)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며 일반적인 수월관음도와 반대로 관음보살이 화면의 오른쪽을 보도록 한 특이한 관음도이다. 물가의 바위 위에 부들자리를 깔고 쌍죽을 배경으로 관음보살이 반가하여 앉아 있는데 풍만한 몸과 얼굴, 시원스러우면서도 자애스러운 눈매, 자연스러운 자세는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사라로 몸을 감쌌는데 사라는 바탕무늬가 없고 금색의 화려한 봉황과 구름무늬가 있습니다. 물 건너 관음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합장배례한 선재동자가 서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그림에는 원래 화기가 있었는데 1812년에 작성된 이능충경의 측량일기에 따르면 그림은 원래 충선왕의 왕비 숙비가 몽고에 잡혀간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주문한 그림으로서 화원 김우문에 의해 그려졌다고 합니다.
<고려청자>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을 1000도씨 이상 높일 수 있는 가마시설과 제작 기술이 필요하고 아울러 그처럼 높은 온도를 견딜수 있는 유약도 있어야 하기때문입니다. 자기는 중국에서 4세기 경에 처음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10세기 초에 처음 청자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자기를 만든 나라이고 일본에서는 1616년 임진왜란 때 잡혀간 도공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서양에서는 17세기 진정한 의미의 자기를 생산해냈습니다.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만들어졌지만 청자를 장식하던 상감기법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되어졌는데 청자의 섬세한 장식기법이나 투명한 유약색으로 인하여 청자 제작기술이 절정에 이른 12세기에는 중국에서도 고려청자를 자기나라의 청자보다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태평노인이라는 호를 가진 중국 문인은 천하제일의 물건들을 꼽기 시작했는데 그 중 청자는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고려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다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술품,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조상들의 업적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단순, 소박, 절제의 미를 대표하던 조선시대의 백자나 문인화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섬세함에 극을 이루던 고려청자와 불화도 우리의 역사속에 녹아져 있고 그런 다양한 문화를 함께 공유하던 우리의 예술과 문화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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