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 포스 원’(Air Force One)은 해리슨 포드가 주연으로 나오는 액션물이다. 미국 대통령 역을 맡은 포드는 모스크바에 가 “미국은 결코 테러리스트와 타협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장 연설을 해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테러리스트들은 경호원을 사살하고 ‘에어 포스 원’을 장악한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극우 러시아 민족주의자를 석방하라는 것이다. 이에 응할 때까지 포로로 잡은 승무원과 요인을 30분에 한 명씩 죽이겠다고 한다. 제일 먼저 이들과 협상을 해보려던 안보 담당 보좌관이 무참히 살해된다.
이 순간 비상 탈출 기구를 이용해 비행기를 떠나기 직전 마음을 고쳐먹은 대통령은 반격을 시작한다. 자기 부하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것을 본 테러단 두목은 손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홍보 담당 여비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지만 대통령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착한 여비서는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이들이 딸의 생명을 위협하자 대통령도 결국 굴복하고 만다. 러시아 대통령에 전화를 걸어 극우 지도자의 석방을 부탁하지만 그가 풀려나기 전 악당들을 때려잡고 가족을 무사히 구해낸다는 것이 줄거리다.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상 자기 가족의 생명이 걸려 있을 때 눈 꿈쩍 않고 이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그런 인간이 있다면 아마도 ‘용기 있는 인간’으로 칭찬 받기보다는 ‘냉혈한’으로 매도되기 십상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러리스트들이 노리는 바고 인질극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까닭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때문에 가장 납치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국민은 정부가 국민을 개떡처럼 보는 나라 사람이다. 어떤 단체가 북한 사람을 납치해 김정일에게 돈이나 정책 변경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수고를 해 봐야 일당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권’과 ‘자국민 보호’를 하늘 같이 알고 있는 선진국 국민들은 다르다. 상대방이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개야 짖어라’ 하고 무심히 있을 수 있는 선진국 정부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인권’에 눈뜨기 시작한 한국은 회교권 테러리스트들에게 훌륭한 목표물이다. 거기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내보내는 나라다. 회교권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을 잡기도 쉽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 봉사를 하던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돼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비난받아야 할 인간들은 탈레반 납치범들이다. 그러나 아프간처럼 위험한 지역에 18명이나 되는 젊은 여성을 포함한 봉사단을 파견한 교회 측도 조심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어찌 됐든 지금 최대 관심사는 과연 아프간 정부가 23명의 탈레반 포로를 석방하라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지 여부다.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4개월 전 이들을 풀어주고 이탈리아 기자의 목숨을 구해준바 있지만 “이 때 한 번뿐”이라는 단서를 달았었다. 이를 어기고 또 풀어준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뿐더러 앞으로 한국 사람은 테러리스트의 단골 표적이 될 것이다.
4년 전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잡혔을 때 일본인들도 납치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김씨를 살리라고 난리였지만 일본에서는 납치된 일본인들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냉정했다.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위험 지역에 들어간 이상 그건 각자의 책임일 뿐이라는 반응이었다. 일본인들은 결국 풀려났고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 후 일본인 납치 사건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인질을 잡은 테러리스트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이는 또 다른 테러를 부를 뿐이다. 머리 속으로는 이렇게 분명한 답이 가족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 흔들리게 된다. ‘인질의 딜레마’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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