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륙 서북부 귀퉁이에 있는 시애틀에도 진귀한 동포들이 찾아온다. 정경화, 조수미, 사라장, 서도호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 시애틀에 들르지만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해 이곳에 자주 오는 본국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
음악가나 미술만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2003년 시애틀에 온 한인2세 작가 이창래(42)씨에게서 뻑적지근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30세 때(1995년) 첫 소설 ‘원어민(Native Speaker)’을 써서 펜클럽/헤밍웨이상과 미국서적상(ABA)을 독차지했다. 4년뒤엔 ‘시늉인생(Gesture Life)’을 발표해 일약 ‘40세 미만의 최우수 미국작가 20인’에 이름을 올렸다.
예일대를 거쳐 오리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뉴욕에서 활동 중인 이 씨가 시애틀에 온 것은 ‘시늉인생’이 그해 시애틀 독서캠페인의 주제소설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Seattle Reads(시애틀은 독서 중)’ 라는 캠페인을 벌여오는 시애틀 공립도서관은 엄선한 베스트셀러를 시민들에게 읽게 한 후 작가와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공립도서관의 연례 캠페인이 아니더라도 시애틀은 비 오는 날씨 때문인지 책 읽는 사람이 많은 도시로 정평 나 있다. 스타벅스 커피점, 맥도널드 햄버거 숍, 공항 대합실, 버스정류장은 물론이고 공원, 해변, 심지어는 산 정상에서도 책 읽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책 판매 전문의 전자상거래로 출발한 아마존닷컴도 시애틀에 본사를 두고 있다.
시애틀지역 한인들도 책을 ‘의외로’ 많이 읽는다. 본보가 지난해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으로 실시한 한인사회 최초의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매월 책을 한권 이상 읽는다고 답했다. 매월 5권 이상 읽는다는 사람이 6.2%나 됐고 18.7%는 2~4권, 25%는 한권을 읽는다고 했다. 연중 책과 담쌓고 지낸다는 사람은 12.4%였다. 바꿔 말하면 서북미 한인사회의 독서인구 비율은 87.6%로 10명중 거의 9명이 평소 책을 읽는 셈이다.
한국의 독서인구도 그동안 크게 늘어 최근 62.2%에 이르렀다지만 서북미 한인사회엔 족탈불급이다. 지난달 보도된 AP통신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독서인구 비율은 중서부가 80%로 가장 높고 서부(72%), 남부(71%), 동북부(69%) 순으로 뒤를 이었다. 백인 독서비율은 74%, 소수계는 68%로 집계됐다. 어느 부류도 한인사회 독서율에 미치지 못한다.
필자는 1990년대 초까지도 9월만 되면 ‘등화가친’을 들먹이며 독서 캠페인을 부추기는 글을 썼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책 읽는 사람보다 읽을 만한 책을 써줄 사람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재미 한인언론인의 대부로 추앙받는 이경원씨(K.W. Lee)는 “미국사회에 한인들의 존재를 알리고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려면 변호사나 의사보다 글쟁이를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한다. 이씨는 지금 그 주장을 스스로 실행하고 있다.
이창래의 ‘시늉인생’은 재일동포 출신 이민자인 프랭크린 하타가 말년에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일인칭 소설이다. 이창래는 하타를 제2차 대전에 징집된 의무병으로 설정,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일본군인들의 비인간적 만행을 낱낱이 폭로한다. 수천, 수만명이 벌인 위안부 만행 규탄시위보다 훨씬 호소력 있게 미국인 독자들에게 어필한다.
벌써 가로수가 물들고 있다. 책과 담 쌓은 12%에 속한 한인들은 개학을 맞은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서라도 당장 손에 책을 들도록 권한다. 특히, 더 이상 자녀들에게 의사나 변호사만 되라고 채근할 것이 아니라 작가도 지망해보도록 유도해, 이창래를 길러낸 서북미에 제2, 제3의 이창래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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