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군수 참모부장(6)
우리가 대만 방문중의 한국 대사는 김홍일 장군으로 그는 국민당 군대의 중장 출신으로 대만에서 존경 받고 있던 분이다. 우리에게는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군사령관을 폭사시킬 때 당시 중국군의 병기창 장이었던 김 장군이 윤 의사가 사용했던 폭탄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분이었다.
그는 우리의 방문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방문 장교 전원에게 도장을 새겨 선물로 주었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그분이 선사한 도장은 아직도 내가 간직하고 있다. 그 분은 중국 정규군 중장 계급이었으나 한국군에서는 소장으로 머물었다.
후일 대만 대사로 가 있는 동안 과거 중국 군대의 동료와 후배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장으로 승진 시킨 유일의 인사로 알고 있다. 그와 나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나는 한국군이 독립된 후 김 장군의 인격을 흠모해 그분 밑에서 육사 생도 1기(현 10기생)생의 생도대장의 직책을 맡은 일이 있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대만 대사 시절, 일본 명치 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사업 전공을 마치고 임시 귀국중이던 민씨댁 규수와 재결합할 때 중간 역할을 담당한 바도 있다. 그 분은 용산 육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조정환 외무 장관이 신부의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으나 조 장관은 10분 늦게 식장에 도착하였다. 시간관념이 엄했던 신랑 김 장군은 10분을 기다리지 못해 나에게 신부의 아버지 역을 대신 시켜 나는 당시 나보다 연상이었던 김 장군의 새 부인의 아버지 노릇을 할 기회를 가졌었다.
후에 조 장관의 부인께서 식장에 좀 일찍 가자고 하였더니 조 장관께서는 높은 사람은 시간을 꼭 맞추는 법이라 고집하셨는데 조 장관의 시계가 10분이 늦어 있었다고 푸념하셨다.
김 장군의 새 부인은 김 장군이 세상을 뜨신후 김 장군의 기념사업에 열중하시다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셨다.
내가 대만 시찰 여행에서 느낀 몇가지 기억들을 정리해 본다. 위험하게 저공비행으로 진입한 마주도의 사령관은 중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림표 장군의 동기생이었으며 철모를 쓰고 육안으로 중공 대안을 바라보며 설명을 하였다. 물론 적의 포화를 항시 받고 있다한다.
대안에 배치되고 있는 적장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같은 국부군의 친구들이었다고 그들의 상세한 성격도 숙지하고 있노라 설명해 주었다. 적의 포화 사정 거리 내에 있을 뿐더러 대만 본토에서 고립되어 순식간에 적의 기습 상륙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어쩌면 한국보다 더 위험한 환경 아래에서 현지 사령관의 늠름하고 의연한 자신감을 엿보게 되었다. 나는 쌍십절 전날밤 행사 무대를 꾸미고 있던 광장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국군의 날 행사 준비를 생각해서였다.
행사장 사열대 건설을 지켜 보았다. 부분적으로 공사가 끝난 사열대 위에는 청춘 남녀가 축음기를 틀어 놓고 들어 누워 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의 행사장 준비는 보안을 위해 사방이 CIC 요원에 의해 행인의 접근이 통제될 때였다. 그리고 많은 군을 갖고 있으면서도 도시에서 군대 이동을 보기 힘들고 경찰지서는 일제시대와 같이 적은 파출소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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