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신문지상을 통해 유쾌하고도 속 후련한 기사를 접했다. 프로골퍼 최경주, 그의 체중만큼이나 두둑하게 보이는 신의(信義)에 관련된 기사였다. 자신이 세계적인 프로골퍼로 인정받기 전 무명시절에 맺은 수페리어 의류업체와의 스폰서 계약을 더 좋은 조건 더 많은 계약금을 받고 다른 스폰서에게 갈 수도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먼저 해약하지 않고 의류업체에서 자진 해약 해지할 때까지 기다리는 성실한 태도와 신의를 지킬 수 있는 그 인격이 참으로 돋보인다. 개개인의 인격 구성 요건에 신의 유무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벼운 친구의 신의에 대한 배신을 처음 경험한 것은 여고시절이다.
여고시절 미술교사는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일본에서 정식으로 교육 받으신 분으로 그 외모가 참으로 특이한 분이었다. 우선 단구에다 반 곱슬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시력 또한 약시여서 검은테 안경이 썩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얼굴색 또한 검은 편이고 그 젊은 나이에 양 볼이 움푹 패여 들어가 오이같이 긴 얼굴. 그러나 두뇌회전이 빠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자칫 지루하기 쉬운 미술시간을 재미있게 이끌어 갔다.
그날의 미술시간 주제는 자신의 지지(Index finger)를 똑바로 펴고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을 가볍게 쥔 모습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어릴 때 친정아버님께서 풍류객를 사랑채에 머물게 하시고 마음이 내킬 때 작품 활동을 하도록 하시는 것을 보면서 자라서일까. 지금은 아니지만은 붓글씨나 그림에 제법 소질이 있는 편이어서 쉽게 드로잉을 끝내고 입체감만 그리면 끝나는데 낑낑 거리던 친구들 몇몇이 돌려가며 내 것을 베끼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책상 밑에 몰래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리저리 다니시며 학생들의 드로잉을 치켜들고 칭찬하시던 선생님이 나에게 오시더니 “남의 것을 베끼면 안 돼요” 하신다. 그러나 나는 ‘아니에요. 얘가 제 것을 베낀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친구가 “제가 베꼈습니다” 하기를 기대하고 그 친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입을 다물고 말똥말똥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당하는 친구의 신의에 대한 배신의 순간이다. 생각할수록 그 미술 선생님의 한구석 빠진 듯한 관찰력에 실망감이 들었다. 나의 엄지는 특이하게 생겨서 조금만 세심하게 관찰했다면 누가 베꼈나 금방 판단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여학생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아도 됐을 것을. 아니 어쩜 그 미술 선생님은 자기 수업시간에 그림은 그리지 않고 책상 밑에 책을 감추어 읽고 있는 학생이 건방져 보였을 것이다.
연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굴지의 미술 대가들의 작품 위작시비, 진위(眞僞) 여부가 세계적 화젯거리다. 우리나라 박수근 화백의 작품 ‘빨래터’의 위작시비가 석연치 않게 진품으로 판정 났다. 미술품은 도난 품목 순위 1위로, 괴도 루팡 전집 등 탐정 추리소설의 좋은 소재로 자주 등장했었다. 소규모로 미술애호가들의 수집품목에서 출발, 왕실이나 귀족들의 전유 상품으로 각광받으면서 근대에 외서는 개인의 구매 소장이 늘어나면서 희소가치와 가격상승이 쌍곡선으로 상승, 그 거래가가 천정부지이다 보니 재산 보존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능 있고 세월 잘못(?) 만난 천재화가가 손쉬운 방법으로 인간근본으로 지녀야 할 신의 따위는 저버리고 위작을 만드는 것이다. 여름에 잘 쓰고 가을에 손쉽게 던져 버리는 부채처럼 미련 없이 신의를 저버리고 위작을 서슴없이 하는 행위는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신의를 빼버리면 무엇에 무게가 있겠는가. 신의는 그 개개인의 인간 됨됨의 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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