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은 일반 대중에게는 40년이 지난 역사이겠으나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되새겨주는 현실이다. 나의 5.16에 관한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빈번히 보도되었으나 본인이 스스로 글이나 청중을 향해 이야기해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5.16으로 인한 정치인뿐 아니라 많은 학자 종교인 학생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생 앞에 군사 쿠데타를 방지 못한 군의 고급 지휘관의 한사람으로서 항상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왔다. 내가 정치인들에게 대한 죄의식에서 해방된 것은 김영삼, 김대중 양씨가 세 번에 걸쳐 단일후보가 되지못해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 정권에 패배한 1983년도부터이다.
군과 학생은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다. 1951년 부산 정치파동에서 군의 일부는 정치의 시녀 노릇을 하였고 급기야는 5.16과 12.12는 헌정 수호의 책임을 맡은 군이 정권을 탈취하게 되었다. 4.19 학생 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고, 마산 학생 시위는 김재규 장군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와 나아가 전두환 장군에 의한 12.12 군사 쿠데타로 연결되었다.
법과 원칙이 무시당하며 국가의 기본이 흔들리는 혼미한 현 정치정세는 5.16을 배경으로 한 대권 도전이 공공연해지는 시국에까지 와있다고 생각할 때 쓰라렸던 5.16의 과거를 돌이켜봄도 의미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5.16에 대한 평가는 아직은 시기상조이며 더욱이 5.16을 반대했던 본인에 의해 5.16이 평가된다는 것은 패자의 변으로 적절치 못하다. 더 객관적이며 광범위한 사실에 입각한 5.16에 관한 역사 기술과 평가가 있기를 바란다.
군사 대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군과 정치관계를 이해함은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자기 군단 포병부대가 쿠데타의 주력 부대로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반대한 군단장이 되었던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5.16을 회상해보려고 한다. 5.16의 진실과 그의 파장을 엮는데 도움 되기를 바라며 5.16으로 명암이 엇갈리게 된 옛 군의 동지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희생된 국민들과 그 가족에게 송구함을 표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동기는 다르나 많은 미국 교포들과 같이 나도 5.16으로 제 2의 인생을 걷게 되었다. 나는 1972년 11월 국내외적으로 첫 유신 반대 시위를 워싱턴에서 지휘한 까닭으로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나의 제2 인생 경험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을 해볼까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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