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방문객들은 스페이스 니들보다 레이니어 산에 먼저 홀린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우람한 설산(雪山)이 너무나 이색적이고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가진 승객은 아마 눈 덮인 정상에서 환호하는 등산객들도 볼 수 있음직 하다.
레이니어 산은 필자가 18년전 LA에서 비행기 아닌 자동차를 타고 서북미 탐방길에 올랐을 때도 푯대처럼 길을 안내해줬다. ‘역지사지의 무소부재’인 면에서 스페이스 니들을 능가한다. 시애틀 주민이 된 필자가 매일(비오는 날은 빼고) 바라보지만 레이니어는 늘 변함없는 자태로 묵묵히 반겨준다. 이젠 레이니어 없는 시애틀을 상상할 수도 없다.
한인들이 ‘눈산’이라는 멋진 별명을 붙였지만 레이니어의 본 이름은 타코마(또는 타호마)였다. 퓨얄럽 인디언부족의 말로 ‘물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화이트·퓨얄럽·니스퀄리·카울리츠 등 수많은 강이 이 산에서 발원한다. 레이니어라는 밋밋한 이름은 영국 탐험가 조지 밴쿠버 선장이 1792년 퓨짓 사운드를 ‘발견’한 후 이 산과 전혀 인연이 없는 자기 상전 피터 레이니어(영국해군 소장)의 이름에서 따다 붙인 것이다. 지난 1920년대까지 연방의회에서 산 이름을 원래의 타코마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이어졌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워싱턴주 최고봉인 레이니어(14,411피트)는 한국 최고봉인 백두산(2,750미터)보다 1,642미터나 더 높다. 맥킨리 산(알래스카, 20,320피트)과 휘트니 산(캘리포니아, 14,505피트)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높다.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은 1899년 전국에서 가장 큰 빙하(26개, 35평방마일)에 덮인 레이니어 산을 미국의 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70년 8월, 남북전쟁 영웅 해자드 스티븐스 장군과 관리인 P.B. 반 트럼프가 야키마 원주민 슬루이스킨의 도움을 받아 사상최초로 레이니어를 정복했다. 정상을 ‘성공 봉(Peak Success)’으로 명명한 이들은 시간이 오후5시가 넘은데다 강풍까지 몰아치는 바람에 정상에서 꼼짝없이 얼어죽게 됐다. 캠핑장비가 전혀 없어 눈 동굴에 피신한 이들은 뜻밖에 지반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수증기에 언 몸을 녹이며 동사를 면했다.
그 후 100여년간 레이니어엔 도전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공원당국이 집계하기 시작한 1930년 이후 16만여명이 ‘성공 봉’에 올랐다. 1890년엔 여교사 페이 풀러(당시 21세)가 여성최초로 정상을 밟았다. 역대 정복자 가운데는 8세 꼬마도, 78세 할머니도 있다.
그러나 레이니어 정복은 결코 녹녹치 않다. 해마다 1만여 명이 도전하지만 절반이상이 중도포기 한다. 연평균 3~5명이 목숨을 잃는다. 지난 100년간 숨진 도전자가 330여명에 달하며 그중 1/5은 시체도 못 찾았다. 파라다이스에서 정상까지 왕복 18마일. 최소 40파운드 무게의 배낭을 짊어진 채 크레바스가 즐비한 가파른 얼음길을 무려 9,000피트 가량이나 걸어 올라가야 한다. 도전자 대부분이 탈진상태와 고소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 어려운 산을 지난주 홍재인·황신성·이기범·이동훈 씨 등 한인 아마추어 등산가 4명이 정복했다. 필자도 속한 시애틀 한인등산회의 에이스 회원인 이들은 대부분의 다른 도전자들과 달리 RMI, IMG, AAI 등 전문 가이드회사의 훈련과 안내보호 없이 독자적으로 위업을 일궈냈다. 대장격인 홍 씨는 이미 두 차례의 정상정복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다.
필자는 동료회원 10명과 함께 2년전 베이스캠프(10,118피트)까지 죽을뚱 살뚱 다녀온 뒤 은근히 뻐겼었다. 눈산 조망대 칼럼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홍씨 등 4명이야말로 필자를 포함한 모든 한인의 영웅이다. 이들이 눈산을 바라볼 때마다 느낄 뿌듯한 성취감은 필자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부득불 베이스캠프라도 한 번 더 갔다 와야 할 것 같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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