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의 생일을 표시해 두었다가 잊지 않고 연락을 해 줍니다. 제가 한국서 자랄 때에는 생일이라면 그저 미역국에 맛있는 음식이 몇 개 상에 오르면 고만인데 독일에서는 생일에 기울이는 정성이 굉장하지요. 그중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질케는 항상 저의 생일을 잊지 않고 전화를 해줍니다. 친구들의 생일을 기억하기는 커녕 저는 결혼기념일도 지난 27년 동안 겨우 몇 번 밖에 기억하지 못했는데.... 생일만 표시해 두는 달력을 하나 사서 표시해 놓고 보는 것도 잊어버리는 게 십중팔구.
간혹 독일 친구들이 제 생일을 물어보면, 적어 놓지마 라고 답하지요. 제발 저의 생일을 잊어버리라고 해도 그 때가 되면 따르릉 하고 질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의 생일을 한 번도 기억 못해주면 몇 번 연락하다가 시들어버리는 게 보통인데. 안 그래요? 그렇게 꾸준하게 연락해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만났어도 단 한 번 질케가 화가 났거나 우울하거나 무슨 일을 잘못해서 어리벙벙 뛰는 것을(바로 저) 보지 못했으니 굉장하지요. 항상 명랑하고 긍정적인 표정이라 ‘어떻게 그렇게 초인간적일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질케와 남편 마네는 둘다 항공 회사에서 일하며 애도 없으니 항상 여행 다니는 게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둘다 식도락가이기 때문에 만나면 맛있는 음식 얘기로 함께 꽃을 피웠습니다. 제가 결혼했을 당시 요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병을 따서 소스를 들어붓는 것 뿐이었는데 항상 음식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질케가 발사믹(Balsamic) 식초라고 이탈리아의 모데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달콤하고 검은 색이 나는 식초 쓰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식초는 끓인 포도의 찌꺼기를 발효시켜 만든 것인데 발삼, 향나무, 벗나무, 밤나무 통에 넣어 12년씩이나 삭힌다고 합니다.
너 이거 먹어 봤니? 하고 물으며 미국에서 램스 레튜스(lamb’s lettuce) 라고 부르고 독일에서는 마쇠라고 부르는 것을 내 놓았습니다. 연하고 동글동글한 잎에 올리브 기름과 그 식초를 흘려 뿌렸습니다. 그 보드라운 잎에 무쳐진 달콤하고 새콤한 맛과 간혹 느껴지는 소금이 혀에
닷자, 음......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그 후부터 발사믹 식초는 제가 아주 즐겨 쓰는 식초가 되었습니다.
90년도 초에 제가 요리 강습을 시작하였을 때 보통 수퍼마켓에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살 수 있는 이탈리아 식품점의 주소를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참, 이 발사믹 식초 얘기가 또 하나 있는데요. 한번은 우리 옆 동네 글렌코브의 ‘라짜노’라는 이탈리아 식품점에서 있은 일입니다. 그 집은 자그마하고 구식이지만 맛있는 푸로시우토(prosciutto 이탈리아식 햄)를 비롯해서 상점 내에서 만든 모짜렐라(동그란 덩어리로 파는 두부 비슷한 질감의 치즈), 리코타(미국의 카테지 치즈와 비슷. 아주 고소한 뒷맛이 있음)등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그 집은 항상 손님으로 바글거리고 저도 항상 찾아가는 집이었습니다.
하루는 발사믹 식초를 사려고 캐쉬어 앞에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네다섯 가지 발사믹 식초병이 있었습니다. 바가지 같이 동그랗고 아주 적은 병이 눈에 띄어 병을 돌려 상표를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잘 생긴 이탈리아계의 젊은이가(아들 뻘), 그거 아주 맛있어요
라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다른 것과 비교가 안되요. 샐러드에 그저 몇 방울만 떨어뜨려 보셔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26달러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비싸겠지요. 좋은 발사믹 식초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발사믹 식초를 3달러 내지 비싸도 4달러 정도면 보통 수퍼마켓에서 살 수 있었을 때라 아무리 굉장해도 저에게는 너무 비싼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쳐다보고 쭈삣한 미소를 지으며 병을 다시 놓았습니다. 헌데 그는 자기 물건 계산을 하면서 제가 그거 선물로 드립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나... 제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는 벌써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그 얘기를 하며 연한 샐러드 잎에 올리브 기름과 식초, 소금, 후추를 넣고 살짝 무쳤습니다. 달콤한 향기가 코를 스쳤습니다. 얼버무린 샐러드를 입에 넣자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음... 소리를 내었습니다. 다른 발사믹 식초와 비교도 안 되는 짓은 농도에 향기와 어울린 그 달콤한 맛이 혀를 자극하였습니다.
다시 질케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일반적으로 동양 여자가 남편에게 자상하고 남편 앞에서 자기 주장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 현모양처로 많이들 생각 하지요. 그런데 간혹 서양 여자들 중에 동양여자를 뺨치게 남편에게 극진히 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질케가 바로 그런 여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생일 때 사 주려고 큰 돈을 모으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함께 여행 중에 그가 좋아하는 물건을 보자 마네에게 선물로 주고 싶으니 우리 더러 표시 안 나게 사서 달라고 잽싸게 부탁 하더군요. 저는 그때 어머나, 나는 그렇게까지 정성스럽게 해주지 못하는데하고 남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변명 같지만 우리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만 정신이 팔려 그들에겐 기막히게 신사적으로 대하고 항상 저를 무시하는 기분을 주지 않는다면 저도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에 왔을 때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마네가 잘 쪽의 이불닛 한쪽을 살짝 열어 놓고 구김 하나 없이 다린 파자마를 그 옆에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얘, 너 같은 처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니?라며 질케를 쳐다 보았습니다. 그 때 질케의 모습을 보고 저도 가끔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런 정성을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오래가지 못한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질케를 만났을 때 또 다른 음식 얘기를 맛있게 하였습니다. 염소 치즈를 약간 도톰하게 잘라 그 위에 생 타임(thyme-양념)과 흑설탕을 약간 뿌리고 오븐에 위를 살짝 그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샐러드 위에 얹어 서브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끔 레스토랑에서 그냥 염소 치즈를 살짝 데워 샐러드와 서브하는 것은 전에도 보았지만 그런 양념은 듣기만 해고 맛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명랑한 표정으로 먹는 얘기를 어찌나 맛있게 하는지 얘기를 들으면서 타임의 향기를 코로 느끼고 새콤한 염소 치즈의 녹는 맛을 느끼는 듯하였습니다. 최근에 함부르그에 갔더니 그 요리가
유행인지 몇 군데서 비슷한 요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파트 공사 문제로 함부르그에 와 있을 때, 며칠에 한번 씩 전화를 하며 혼자 있으니 심심하지 않느냐고 얘기 동무가 되어주어 너무나 고맙고도 사랑스럽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 질케가 자궁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렇게 운동을 많이 하고 건강한 사람이. 그 후로 늦게 발견된 이유로 치료를 위한 눈물나는 노력이 계속 되었습니다12월 초에 질케가 60회 생일 파티를 크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치료를 견디어 낼 용기를 조금
이라도 주기 위하여 꼬옥 가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이 출장 중이라 혼자서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를 탔습니다. 앞 좌석 사람과의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어 좋았습니다.
저는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고 앞에 앉은 피부가 약간 거므스름한 남자는 조그만 책을 조용히 흥얼거리며 읽었습니다. 이슬람교인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제가 막 집에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두 손을 책상 위에 얹고 머리를 갖다 대었습니다. 꼭 저에게 절을 하는 식으루요. 아무리 남을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한다고 해도 그 절을 받으며 차마 먹을 수가 없더군요. 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그는 현재 독일에 200만이나 되는 터키 사람으로 읽고 있던 책은 코란(이슬람 교인들의 성경) 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가서 도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전쟁에 가족 중 한 사람이 갔었다는 사람을 미국이나 터키에서도 몇 만났습니다. 자기 나라를 위해서라도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이 힘든 일인데 더군다나 남의 나라에 가서 고마워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니! 그런 때는 그저 참 안 되었다는 표정으로 답을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차하면서 그에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아버님께는 감사하다고 전해주셔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유난히 하얀 이를 내 보이며 눈을 끔뻑해 보였습니다. 약간 마른 듯한 질케는 훨씬 더 예뻐 보였습니다. 짧게 자른 머리는 특별한 포마드로 약간 세워서 빗었고 연한 갈색의 끄트머리만 금발로 물을 들인 것이 아주 귀여웠습니다. 마인 강변의 근사한 루더(Ruder-배 젓는) 클럽에 친구들이 방방곡곡에서 모였습니다. 모두들 질케를 위하여 만사를 제쳐놓고 왔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멀리서 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 하였습니다. 둘이다 식도락가이니 메뉴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댄스 음악까지 켜 놓고 흥을 돋구웠습니다.
질케는 그 날을 잘 지탱하기 위하여 한줌의 약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에게 나을 가능성이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악화된 병을 견디어 내지 못했습니다. 6개월 후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 이번에는 질케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관이 놓여 있는 장례 식장에 사람들이 다 들어가지를 못하여 바깥의 홀까지 꽉 찼었습니다. 친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까만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고 울음을 참는 한두 여자의 흐느낌이 간혹 들릴 뿐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장례식에서 남 앞에 우는 소리를 안 내려고 하더군요.
간단한 식이 이루어지고 몇 사람이 질케에게 명복을 빈다는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질케가 원하던 대로 화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랜 친구인 우리 남편은 끝으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풀룻으로 불었습니다.식이 끝나고 나오다가 마네가 저를 보고 아, 영자 하며 저를 끌어 안았습니다. 그 큰 몸집에 걸린 양복이 헐렁해 보였습니다. 저는 고이는 눈물을 참으려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질케의 언니는 새빨개진 눈으로 다가 왔습니다. 질케와 아주 단짝인 리나를 보았을 때도 눈물이 솟구치려 하여 그녀의 팔을 한번 질끈 잡았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발을 옮겼습니다. 모두들 감정이 북받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질케가 아픔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기를 바라며 그 곳을 떠났습니다. <계속>
제 생일을 항상 잊지 않고 축하해 준 친구 질케(맨 오른쪽)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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