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없는 한국제
요즘 한국을 방문하는 한인들의 가방이 예전보다 작아진 것 같다. 반대로, 미국에 돌아오는 한인들의 짐 가방은 이민 보따리마냥 커 보인다. 그저께 서울에 가는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한국여행의 풍속도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한국에 한번 나가려면 가방이 메어 터졌다. 부모, 형제자매, 친구는 물론 이웃사촌과 사돈의 팔촌에까지 뿌릴 ‘미제’ 선물을 바리바리 꾸려야 했다. 요즘엔 서울에 없는 미제가 없다. 더구나 한국에 있는 것들 중 미국엔 없는 것들도 있다.
등산회 총무가 서울서 가져온 탬폰(등산화 용 체인) 한 박스를 놓고 40여 회원이 쟁탈전을 벌였다. 한인들이 ‘Made in Korea’ 옷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건 옛날이다. 요즘은 없어서 못 산다. 라면, 고춧가루에서 휴대전화와 TV에 이르기까지 한국제가 인기다.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를 타는 사람은 벤츠를 모는 사람 못지않게 선망의 대상이다.
물건만이 아니다. 본국의 대중가요와 TV드라마가 한인사회에서도 뜬다. 본국 선수들이 미국에서 경기를 벌이면 한인사회의 응원이 본국 못지않게 뜨겁다. 재작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애틀 동포간담회에 끼지 못해 안달하는 한인이 많았었다. 재외동포 참정권 허용과 함께 본국정계 진출을 노리는 사회단체장들이 더 많아졌다는 말도 들린다.
장장 한 세기의 이민연륜을 넘긴 한인들이 다른 이민민족처럼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본국 문화권에 점점 더 예속돼가는 듯하다. 포드나 도요타를 타고, 햄버거와 피자를 먹고, 이름을 존이나 제인으로 바꾸고, 오바마 후보에 투표를 해도 한인들의 본국 지향의식은 100여년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첫발을 디딘 이민조상들과 매한가지다.
작금의 극심한 불황 탓인지 이민 온 것을 후회하는 한인들까지 있다. “미국이 기회의 땅인줄 알고 왔는데 이제 보니 진짜 기회의 땅은 한국이었다”며 한탄한다. 자기보다 훨씬 못살았던 이웃이 호화 아파트에서 떵떵거리고 산다며 부러워한다. 본국 친지들이 재미교포를 재미 ‘고포(苦胞)’로, 재미동포를 재미 ‘똥포’로 부른다며 자조하기도 한다.
한인들의 시세가 땅에 떨어진 건 어제 오늘이 아니다. 본국경제가 80년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하며 잘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미국으로 떠나는 이민자들을 보는 대다수의 시각이 ‘선망’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 눌러 있었더라면 잘살게 됐을텐데 괜스레 이민 가서 팔자에 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 판단력 없는 사람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본국인들이 잘살게 된 것을 배 아파할 이유가 없다. 세계의 축소판인 미국에서 잡다한 민족과 어깨를 겨루며 살아야하는 한인들은 모국이 부강해야 어깨를 펼 수 있다. 실제로 투자금융, 부동산, 교육, 관광, 여행, 숙박, 요식 등 한인사회의 수많은 업종이 본국 경제권에 예속돼 있다. 싫든 좋든 본국인들이 많이 와야만 한인사회 경기가 풀린다.
최근 서울대학 병원과 한양대학 병원 관계자들이 나흘 간격으로 시애틀에 찾아와 ‘재외동포 우대 특별진료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홍보했다. 이젠 진료까지 본국지향 시대가 됐다. 자고로 난치병 환자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치료 받으러 오는 것이 정석이다. 필자의 이민 계기도 아내의 진료였다. 어느새 한국이 의료기술과 시설 면에서도 앞섰다. 언젠가는 영어공부를 위해 자녀들을 한국에 보내는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처럼 좋아진 한국에서 아직도 미국이민 지망자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한국에 있는 뇌물 먹는 대통령이 미국엔 없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 같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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