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비우스는 기원 전 2세기 로마에서 살던 그리스인이다. 그리스 기병대장 출신이던 그는 로마에 인질로 끌려와 16년간 살며 티베르 강가의 자그마한 마을에 불과하던 로마가 어떻게 한 때는 페르샤 제국과 맞서 이긴 그리스를 속국으로 만들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할 수 있게 됐는가를 연구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결국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아무에게나 복을 주지 않는다. 복을 받게 처신하는 사람이라야 복을 받는다. 그는 로마가 복 받은 이유를 1인과 소수, 다수가 공존하는 혼합형 정치 체제에서 찾았다.
로마 정부는 법을 집행하는 집정관과 예산과 입법을 맡은 원로원, 그리고 일반 민중들로 구성된 민회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이 서로 견제하며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회가 통합되고 강한 단결력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1인 체제인 왕정은 폭군 체제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귀족 정치는 과두 정치로, 다수가 권력을 갖는 민주 정치는 중우 정치로 반드시 타락하게 돼 있으며 이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들 세 체제의 요소를 골고루 갖춘 혼합 정치라 봤다. 로마가 바로 그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로마 최대의 철학자이자 웅변가의 하나인 키케로에 의해 받아들여져 로마 번영 원인의 정설로 굳어진다.
수많은 고대 현인들 가운데 미국의 창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폴리비우스와 키케로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류 정치사가 독재와 무정부 상태의 진동이라고 보고 미국만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 마련에 골몰했다. 그들이 얻은 결론 역시 그 최선의 방법은 혼합 정부의 설립이라는 것이었다.
현 연방 체제가 대통령, 상원, 하원으로 구성된 것은 1인과 소수, 다수가 권력을 나누는 혼합 정부의 산물이다. 또 대통령을 뽑을 때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로 한 것이나 상원의원도 직접 선출이 아닌 주 정부에서 뽑도록 한 것(나중에 헌법 개정으로 바뀜)도 다수인 국민의 영향력을 줄이고 1인과 소수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창업자들이 민주주의를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가 안정되고 최대한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권력이 국민들 손에 있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건국 당시 이들이 열심히 연구한 것은 고대 이스라엘 모세의 율법과 앵글로 색슨의 불문율이었다.
이 두 법규는 놀랄만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자유민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지도자를 스스로 뽑고 법을 만들며 못된 지도자를 쫓아낼 수 있도록 돼 있었다는 점이다. 못난 지도자를 평화적으로 쫓아낼 수 있다는 점이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이 길이 막힐 경우 국민들은 폭정에 시달리거나 피를 흘려가며 혁명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지난 주말 일본 유권자들은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통치해 오던 자민당을 쫓아내고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민주당은 과반수가 훨씬 넘는 의석으로 안정적으로 의정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됐고 부패와 무능의 상징 자민당은 졸지에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준 순간이다.
민주당의 강령은 반시장, 보호무역, 탈미 자주 등으로 일견 20년째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 경제를 살리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이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들에게 정권을 맡겨 신통치 않으면 다시 쫓아내면 된다. 그 동안 광야로 나갔던 자민당은 반성 끝에 새로운 모습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할 것이고 그러면서 정치와 사회는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고인 물이 썩듯이 어떤 당, 어떤 세력도 오래 권력을 쥐고 있으면 반드시 부패한다. 일본이 정권 교체가 잦은 미국이나 한국보다 정치 사회적으로 침체돼 있는 것도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정치적 지각 변동이 장기 불황으로 주눅 든 일본이 새롭게 깨어나 활기를 찾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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