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공항에서 엄마가 휠체어에 실려 나오셨다. 비행기가 제 시간에 잘 도착해 지금 나왔다는 전화를 하신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그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셨다는 것이다.
앰뷸런스로 응급실에 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면서도 엄마는 넘어질 때 놓친 김치 병이 깨지지 않은 걸 기적이라고 무척 고마워하셨다. 사단의 원인이 된 그 김치 병을. 그 날 밤 시커멓게 멍이 든 다리에 얼음찜질을 해드리는데 엄마가 물으셨다.
“얘, 글쎄 할머니가 어떠셨는 줄 아니?”
엄마가 이렇게 운을 띄우시면 나는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훤히 다 안다. 그러나 듣고 또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증조 외할머니의 손녀(엄마) 사랑 이야기. 어릴 적에는 엄마가 증조 외할머니와 한 집에서 살았으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엄마가 결혼을 한 후에도 증조외할머니는 엄마를 못 잊어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집에서 곰국이라도 끓이는 날이면 할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몰래 가마솥에 담긴 곰국을 작은 냄비에 덜어 보자기에 싸서 들고 20여분을 걸어 엄마한테 가져다 주셨다는 이야기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한 손으로는 따끈따끈한 곰국냄비가 싸인 보자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당시의 아녀자들의 외출복이었던 쓰개치마로 얼굴을 둘러싸고 그 끝을 턱밑으로 모아 잡고 잰 걸음을 하시는 증조외할머니의 모습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폭의 풍속도로 가슴에 남아있다.
“수정아, 엄마 외할머니는 어떠셨는 줄 아니?”
나도 딸아이에게 나의 외할머니 얘기를 종종 한다. 큰 외손녀인 나를 ‘큰애’라고 부르셨던 외할머니는 빈 광주리를 들고 우리 집에 오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엄마 몰래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셔서 내 주머니는 늘 두둑했었다. 밭에 철철이 나는 푸성귀를 광주리에 한껏 담아 이고 장에 나가서 그걸 팔아, 내게 줄 용돈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내게 한 푼이라도 더 주시기 위해 할머니는 열 정거장도 넘는 거리를 걸어오시곤 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임시로 몇 달 동안 할머니 댁 가까이 집을 빌려 동생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한 번은 변소 치는 차가 오질 않자 외할머니가 손수 지게로 오물을 나르시기도 했다.
“스윗 하트, 엄마의 그랜마는 어떠셨는 줄 아니?”
이렇게 딸아이가 운을 띄우면 장래 내 손녀는 듣고 또 들었던 이야기를 지루해하지도 않고 턱에 손을 궤고 들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글쎄 엄마가 뉴욕으로 이사 왔을 때 엄마 외할머니가 다니러 오셨는데 공항에서 그만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셨단다. 왜냐하면 엄마랑 아빠 주신다고 만두랑 김치를 손수 만들어 한 손으로는 만두로 가득한 가방을 밀고, 다른 손에는 커다란 김치 병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시다가 가방을 놓치신 거야. 그 가방을 잡으시려다가 그만 다른 손에 드신 김치병도 놓치시고, 당황하신 할머니는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지신 거야.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말이지. 앰뷸런스로 응급실에 실려 가시면서도 김치병 안 깨진 걸 어찌나 다행으로 생각하시면서 좋아하시던지....라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에서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의 천왕봉 일출은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삼 대째 내려오는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력이 있다. 우리 집에도 이렇게 삼 대째 내려오는 귀한 전통이 있으니 바로 할머니의 못 말리는 손녀사랑이다.
이영옥 / 수필가·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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