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태양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20세기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철학자의 하나로 꼽히는 헤겔의 말이다. 칸트, 피히테 등과 함께 독일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그의 사상은 좌로는 마르크스를 통해 공산주의, 우로는 국가 지상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해 나치즘과 파시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지만 역사는 정반합의 투쟁을 거쳐 발전한다는 변증법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철학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음에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 중 하나가 문명의 이동이다. 문명의 중심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그 방향은 해와 같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고대 문명은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서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헤겔은 독일이야말로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양 문명의 정점으로 봤지만 실제 역사는 프랑스와 영국이 패권을 다투다 영국의 승리로 끝나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전까지 소위 ‘영국의 평화’(Pax Britannica)가 계속됐다.
1939년 제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며 ‘독일의 시대’를 여는가 싶더니 ‘천년 제국’은커녕 6년을 못 넘기고 패망하고 말았다. 그 덕에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한 것은 대서양 넘어 서쪽에 있는 미국이었다. 세계가 잿더미로 변한 상황에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유일한 세계의 공장이자 곡창이었다. 전쟁 직후 미국의 GDP는 전 세계 GDP의 50%를 차지했다.
서유럽과 일본이 부흥했으나 미국의 우위는 흔들리지 않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2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득 찬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2000년대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미국 발 금융 위기는 세계 경제를 얼어붙게 했다.
그 후 세계 각국이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 신용 경색은 많이 완화되고 경기도 회생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미국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오죽하면 유엔에서 미국 달러화를 대체할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러나 이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 위상의 추락을 분명히 보여준 것은 지난 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G 20 정상회담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 등 종전의 G 8 회담을 앞으로는 한국과 소위 ‘브릭스’라 불리는 중국, 브라질, 인도, 러시아 등이 포함된 G 20 회담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한 때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서방 선진국만으로 지금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한국을 위시한 신흥 강국의 위상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거기다 다음 회의 주최국이 한국으로 정해지자 한국에서는 ‘올림픽 못지않은 경사’라며 들떠 있는 분위기다. 다소 지나친 감은 없지 않지만 한국이 신흥강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장한 일임에 틀림없다. 전 세계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때 한국의 현대/ 기아차와 삼성, LG 등이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는 점은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일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부터 썩고 무너지다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한 것이다. 아직 미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라는 법은 없다. 문명의 중심은 태양처럼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수준 미달의 초중고등 교육, 적자가 확실한 소셜 시큐리티, 치솟는 의료비, 늘기만 하는 국채 등이 미국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미국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미국의 해도 언젠가는 질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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