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이란 말이 있다. ‘큰 그릇은 늦게 된다’라는 뜻으로 정말 크게 될 사람은 남보다 늦게 빛을 본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꼽을 수 있다. 32살에 과거에 급제해 변방을 돌다 44살에 겨우 정읍 현감 자리를 얻었다. 그러던 것이 1592년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다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가장 위대한 한국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서양에는 시저가 있다. 시저가 이순신이 급제한 나이 때 스페인을 방문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을 보고 “알렉산더는 내 나이에 전 세계를 정복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한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는 40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지금 프랑스인 골 지방과 영국을 정복하고 정적들을 물리친 후 사실상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됐다. 독일 황제를 일컫는 카이저나 러시아 황제의 호칭인 챠르 모두 시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업적보다 시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암살당하기 직전 조카딸의 아들인 19살짜리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이 어린 후계자는 곧 숨을 거둘 것이란 주위의 예상을 깨고 브루투스 등 시저의 암살자는 물론 자신의 경쟁자인 안토니와 자신을 적대시하는 상원의원 300여명을 모조리 제거한 후 권력을 움켜잡는다.
그는 그 후 세제를 공평하게 하고 다리와 도로를 정비해 로마의 경제 기반을 탄탄히 하는가 하면 국방을 튼튼히 해 향후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의 기틀을 놓는다. ‘로마의 평화’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로마 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는 그에게 바친 찬사다.
로마에 아우구스투스가 있다면 일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다. 작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인질로 끌려가 일찍 삶의 신산을 맛 본 그는 타고난 끈기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힘을 기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잔당을 물리치고 일본의 패자가 된다.
그 후 그는 히데요시의 아들을 죽이고 도쿠가와 막부를 열어 100년간 내전에 시달리던 일본에 평화를 가져온다. 이 평화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질 때까지 260년이나 계속된다. 역시 일본 최대 시인인 마쓰오 바쇼는 걸작 ‘먼 나라로 가는 좁은 길’(오쿠노 호소미치)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덕을 찬양한다.
아우구스투스와 도쿠가와가 요즘 세상에 살았으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아내와 장남까지 죽였다. 많은 사람을 죽여야 긴 평화가 온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지만 진실이다. 권력에 대한 도전자가 남아 있는 한 평화는 멀다.
마르티 아티사리, 무하마드 유누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왕가리 마타이, 시린 에바디, 데이빗 트림블, 카를로스 벨루, 조셉 로트블랫, 알바 뮈르달. 지난 수년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들이다. 각 분야에서 인류를 위한 봉사를 했는지는 몰라도 이들 덕에 지구상에 평화가 왔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역사에서 진정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공산주의 몰락을 앞당김으로써 냉전을 종식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압제에서 해방시킨 레이건이 1순위로 꼽혀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끝내 받지 못했다.
노벨상 위원회가 올해 평화상 수상자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취임한지 열 달도 안 되고 아직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그가 상을 받게 된데 대해 어안이 벙벙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과거 이 상을 받은 사람 면면을 살펴보면 그라고 받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노벨상 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상과 업적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남을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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